도시인의 심드렁한 얼굴에서 찾아낸 작은 쉼표
서울 연희동 홍제천 근처 작은 골목에 자리한 쿠키바로, 개업 5주년을 맞았다. 도시인의 ‘심드렁’한 얼굴을 쿠키로 굽는 작업에서 출발해, 지금은 전시와 퍼포먼스까지 확장된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시그니처 디저트
심드렁 쿠키

나는 심드렁한 도시 사람들의 얼굴에서 태어난 쿠키야.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무표정, 하루를 버티는 이들의 지친 표정이 내 기본값이지. 프랑스산 버터를 듬뿍 머금은 덕에, 굽기 전부터 버터 향이 배어나와. 하루 수십 번 구워지는 내 표정은 매번 약간씩은 달라져. 비슷해 보여도 사실은 전부 다른, 너희들처럼 말야. 솔직히 누가 나를 베어먹든 별 감흥이 없어. 부서지든 떨어지든 깨지든 비슷한 표정. ‘그러든가 말든가.’ 이 무심함이 나의 스타일인지도! 너의 짧은 쉼에 말없이 함께하는 조용한 존재. 이런 나를 알아채면 어쩐지 너는 먹기 미안한 얼굴을 하지. 그러면 나는 속으로 조용히 웃곤 해.
베이커스 스토리
심드렁한 표정의 쿠키……! 저 역시 대표님을 창작자로 알고 있었는데요, 이런 작업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만들고,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의미를 기록하곤 했어요. 어느 날 문득 쿠키 반죽으로 도시에서 자주 마주치던 ‘심드렁한 얼굴’을 만들어보았는데, 그걸 SNS로 본 많은 분들이 기대치 못했던 만큼의 공감을 보여주셔서 자연스레 가게 형태로 확장되었습니다. ‘심드렁’은 사실 무기력보다는, 과도한 리액션과 설명을 요구하는 시대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쉼표이기도 해요. ‘결과물’보다 그 뒤에 있는 과정, 움직임, 관찰, 시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베이킹도 가게 운영도 전시나 퍼포먼스 기획도 결국 하나의 세계로 일굴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창조적인 작업, 그런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라 참 좋네요. 여길 찾아주는 손님이자 방문객분들 역시 대체로 ‘심드렁’한 표정일까요?
처음엔 대부분 무표정으로 들어오세요. 낯선 공간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쿠키를 바라보거나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 순간,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바뀌는 걸 자주 봅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환하게 웃으시기도 해요. 그래서 이곳을 찾는 분들의 표정은 ‘심드렁함’이라기보다는 조용히 마음이 풀린 얼굴에 더 가깝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혼자 이끈다는 과정이 녹록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시작부터 지금까지 1인 프로젝트를 유지했던 건 힘든 점도 있지만 강점도 있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혼자 일한다는 건 분명 고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가 만들고 싶은 결을 타협하지 않고 적확하게 구현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혼자 일하는 만큼 스스로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가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나 아이디어도 무의미해질 때가 많더라고요.
관성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만큼 영감이 들어올 여유가 확보되어야 하겠는데요. 일 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듣고 싶어요.
평범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휴무나 퇴근 후에는 밀린 집안일을 정성스럽게 해치우고, 최소 주 2회 이상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식사를 제대로 차려먹어요. 근무 중에는 아무래도 대충 때우는 일이 많아서, 이렇게 잘 차려먹는 식사가 주는 효능감이 꽤 크더라고요. 또한 영감이나 생각의 재료들을 위해 책, 영상, 전시, 다양한 매체를 병렬적으로 듣고 보는 편입니다. 특히 《헌터 헌터》라는 만화를 보면서 체력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한 뒤에는 올해 초부터 PT도 시작했어요. 생각보다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 즐거워요.
그렇게 일상적인 장면에서 찾아온 영감은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구현하는 편이세요?
거리에서 마주친 얼굴, 손님의 무심한 한마디, 쿠키가 금 가는 모양, 가게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문득 눈에 들어오면, 핸드폰 메모에 단어나 문장을 바로 적어두거나, 메모장에 스케치하듯이 짧게 아이디어를 남기는 정도예요. 하지만 그 기록을 곧바로 어떤 결과물로 연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 여러 메모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아, 이건 이런 방식으로 메뉴가 되겠다’, ‘이건 전시 모티프로 연결되네’ 하는 판단을 내리게 돼요. 결국 작은 관찰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메뉴 개발도 브랜딩도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관찰’이라는 키워드가 대표님의 작업방식을 잘 설명해준다고 느껴집니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하루 속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느끼시는지요.
문 열기 전 반죽을 만지고 얼굴을 그리는 시간에는 재료의 온도와 촉감 덕분에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고, 하루가 천천히 깨어나는 느낌을 받아요. 쿠키가 구워지는 냄새와 열기, 얼굴이 하나씩 굳어가는 과정에서는 관찰자 같은 감각이 생기고, 손님을 응대하는 시간에는 매번 다른 말투와 표정에서 작은 파동 같은 감정 변화를 느끼곤 합니다. 마감을 할 때 하루 동안 남은 작은 흔적들을 정리하면 ‘오늘은 이런 결이었구나’ 하는 수용의 감정이 남습니다.
‘심드렁’은 어떤 식으로 성장하고 있나요? 그런 과정에서 꾸려진 심드렁만의 질서가 있다면요.
저는 숫자나 외형적인 확장보다 ‘세계관이 얼마나 단단하게 축적되는가’를 중요한 지표로 봐요. 쿠키바이자 작업실, 작은 극장 같은 구조를 지닌 곳이기에, 이곳의 성장은 곧 제가 구축하는 감각, 언어, 방식이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조금씩 확장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심드렁 쿠키를 처음 만든 시점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무심함의 미학’, ‘작은 표정 하나가 쌓아올리는 정서’, ‘움직임과 멈춤의 세계관’ 등이 다른 메뉴나 전시로 자연스럽게 번져갈 때 ‘아, 심드렁이 자라나고 있구나’ 느껴요. 이를 지탱하는 시스템은 아주 단순합니다. ① 매일의 작업을 직접 손으로 만들고 ② 감정의 중심을 지키고 ③ 모든 결과물의 결이 같은 방향을 향하는지 점검하는 것이, 심드렁만의 작은 질서라고 생각해요.
작지만 단단한 브랜드 ‘심드렁’의 다음 발걸음이 궁금해요.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꿈은, 심드렁 쿠키에서 출발한 ‘심드렁한 세계’를 확장하여 보여주는 일입니다. 쿠키뿐 아니라 인형극, 전시, 사운드 작업 등 분리돼 보이는 활동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음을 한층 선명하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작업을 모아 아트북으로 묶고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형태 로 공유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심드렁
류수현의 비터스윗 모먼트
Bitter moment
가게 운영과 작업을 혼자 감당하다 보니, 에너지와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브랜드의 방향성과 현실적인 운영 사이에서 조정해야 할 순간들이 있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갑작스러운 대량 주문 요청이나, 전시 준비와 가게 일정이 겹쳐 작업대 위에 반죽과 서류가 뒤섞여 있는 순간 같은 것들입니다. 체력적인 피로도 있지만, ‘지금 이 일을 받아야 하는가’, ‘이 방향이 브랜드와 맞는가’를 고민할 때 마음의 소모가 더 크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춰 중심을 다시 확인합니다. 무엇을 유지해야 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묻다 보면, 천천히 다시 균형을 찾게 됩니다.
Sweet moment
심드렁에 와주시는 손님들은 유독 귀엽고 조심스러우며 따뜻한 분들이 많은데요. 심드렁 쿠키의 특징을 살려 뜨개로 선물해주신 분도 있고, 가끔 정성스레 쓰인 손편지를 받기도 해요. 최근 가장 벅찼던 순간은, 한 외국 손님은이첫 한국여행의 목적지를 ‘심드렁’으로 정해서 들러주신 일이었습니다. 작은 얼굴 하나를 굽는 일이 누군가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커다랗게 다가왔어요. 그분이 상상만 하던 쿠키를 실제로 받아들고서 웃으시던 얼굴이 오래 남아요. 단지 작은 얼굴 하나를 만든 대가로, 정말 깊고 다채로운 여러 가지 얼굴들을 선물받게 되는 일을 하고 있네요.
글 쪽프레스 jjokkpress
출판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레이블로,
콘텐츠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선보입니다.
2018년부터는 ‘쪽’이라는 이름에 담기지 않는
묵직한 콘텐츠를 ‘고트’라는 이름으로 전개합니다.
푸드스타일링·사진 더 스피니치 THE SPINACH x JW studio
푸드콘텐츠에이전시. 음식이 가진 본질과 브랜드의
결을 정확히 읽어 이미지로 담아냅니다.
Directed & Food-Styled by 박명원 Photographed by 김신욱·엄승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