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어떻게 웰니스의 상징이 됐을까
고대 그리스 전쟁에서 마라톤 평야의 승전을 알리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달려갔다는 일화에서 마라톤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42.195km를 달리는 선수들의 얼굴에는 그 숭고한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그래서 마라톤은 인간이 한계를 넘어 도전하는 정신의 상징이 되어왔고, 오랫동안 ‘올림픽 정신’을 대표하는 엘리트 선수*들의 무대였습니다. * 특정 스포츠 종목을 직업으로 삼아 경기나 대회 출전을 목표로 훈련하는 선수

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 엘리우드 킵초게 / 사진: Imago Images Sports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마라톤은 조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선수가 아닌 일반인의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선수들만 달리는 경쟁의 무대에서 일반인도 함께 달리는 ‘모두의 스포츠’로 확장되었거든요.
뉴욕 시티 마라톤과 첫 번째 러닝 붐
지금은 세계 7대 마라톤* 중 하나로 꼽히는 뉴욕 시티 마라톤은 처음엔 그저 지역 행사에 불과했습니다. 1970년 열린 첫 대회 참가자는 127명, 예산은 고작 100만 원 남짓이었죠.
뉴욕 시티 마라톤의 목표는 1897년 창설된 보스턴 마라톤을 따라잡는 것이었고, ‘모두를 위한 마라톤’이라는 색다른 비전을 내세웠죠. 이를 위해 당시 보스턴 마라톤에는 출전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힘썼고, 마침 미국 사회에 불던 페미니즘 흐름과 맞물리며 양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한 대회로 정체성을 만들어 갔습니다.
* 보스턴, 시카고, 뉴욕, 베를린, 런던, 도쿄, 시드니에서 열리는 세계 주요 마라톤 대회

웰니스 라이프의 아이콘이 된 뉴욕 시티 마라톤 완주 메달 / 사진: Sipa USA
1970년대, 미국 전역에는 러닝 붐이 일었습니다. 베트남전의 후유증과 히피문화, 시민운동의 물결을 지나며 사람들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자기 삶의 균형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스스로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수단이 되었고, 한 해 평균 200개에 달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릴 만큼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도심 공원에서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중산층에게 러닝은 자기 관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뉴욕 시티 마라톤을 주최하는 뉴욕 로드 러너스 클럽(New York Road Runners Club, NYRRC)은 이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 중심의 대회 대신, 모든 성별과 연령에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완주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대회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에 상관없이 끝까지 달릴 수만 있다면 누구나 피니시 라인에서 메달을 받을 수 있었고, 이 메달은 웰니스 라이프를 상징하는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뉴욕 마라톤은 러닝 문화와 젠더 평등, 그리고 도시 브랜딩이 맞물린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죠. 2025년 대회 참가 신청자는 20만 명. 완주자는 5만 명이 넘고, 경제효과는 약 1조 원에 이릅니다. 기록의 무대였던 마라톤이 사람들의 무대로 옮겨가면서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러닝 슈즈의 대명사로 떠오른 나이키
이런 흐름 속에서 함께 성장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나이키입니다. 1970년대 초, 나이키는 가볍고 쿠션감이 뛰어난 러닝화 ‘코르테즈’를 선보였습니다. 이 모델은 높은 기술적 완성도로 주목받을 수 있었죠.
러닝 붐 덕분에 매출이 급증한 나이키는 1973년에 미국 장거리 육상 스타 ‘스티브 프리폰테인’ 후원 계약에도 성공합니다. 트랙 위에서 누구보다 거침없던 그는 나이키가 추구한 ‘두려움 없는 도전’을 내세우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나이키는 단순한 스포츠 용품 회사를 넘어 도전과 용기라는 철학을 담는 브랜드로 자리 잡습니다.

스티브 프리폰테인이 실제 착용했던 나이키 코르테즈 / 사진: ZUMA Press Wire
1971년에는 28억 원에 불과하던 나이키 매출은 1973년 410억 원, 1981년에는 642억 원으로 성장했습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나이키 성공 신화의 시작점을 마라톤 붐이 불었던 1970년대로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죠.
포스트 팬데믹 시대,제2의 러닝 붐
첫 번째 러닝 붐이 일어난 지 50년이 흐른 뒤, 코로나19가 다시 세상을 바꿨습니다. 실내 스포츠가 멈춘 팬데믹 시기,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합니다. 헬스장 대신 공원이, 실내 트랙 대신 도심이 운동장이 되어,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로 거리가 채워졌습니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스포츠 슈즈 매출은 2018년에 비해 50%나 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팬데믹이 만든 새로운 습관이 있었죠. 야외를 달리는 경험이 ‘심리적 해방’과 ‘자기 회복’을 상징하게 된 겁니다.
2024년 런던과 뉴욕 시티 마라톤 참가자는 각각 55,000명을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러닝 크루와 러너스 클럽이 생겨났고, SNS에는 해시태그 #RunningCrew, #RunForLife가 넘쳐났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젊은 세대에게 러닝은 ‘트렌디한 자기관리’가 되었습니다. 달리는 일은 곧 새로운 일상의 리추얼이 되었죠.
러닝 아이콘으로 떠오른 온 러닝과 호카
제2의 러닝 붐은 스포츠 브랜드의 판도까지 바꿔놓았습니다. 그 중심에는 호카(HOKA)와 온 러닝(On Running)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호카 러닝화는 압도적인 쿠셔닝으로 러너들의 발을 사로잡았습니다. 2024년 매출은 전년 대비 27.9% 증가한 2조 5,689억 원. 이 성장세에 힘입어 호카는 마라토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5위로 올라섰습니다.
온 러닝은 기술과 디자인 두 가지 모두에서 혁신을 보여줍니다. 클라우드텍(CloudTec) 기술은 달릴 때 충격을 최소화하고, 지면을 부드럽게 밀어주는 추진력을 만들어냅니다. 최근에는 스페인의 로에베(Loewe), 한국의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과 협업하며 패션 슈즈 시장까지 공략하고 있죠. 기술적 완성도에 더해 디자인 감각까지 인정받은 온 러닝은 2024년 매출 3조 5,672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30% 이상 성장했습니다.

호카와 온 러닝의 상승세는 주가에도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호카는 약 1.9배, 온 러닝은 2배 가까이 주가가 뛰었습니다. 반면 전통의 강자 나이키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판매 전략의 부진뿐 아니라, 기술과 디자인 모두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러닝 붐의 상징이 나이키였다면, 이제 포스트 팬데믹 세대를 대표하는 브랜드는 호카와 온 러닝입니다. 달리기가 다시 한 번 시대의 문화를 바꾸고 있는 셈이죠.
하코네 에키덴, 작은 온천 마을을 들썩이는 달리기
일본의 온천 마을 ‘하코네’는 인구 12,000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새해 첫 이틀 동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됩니다. 10명의 대학생이 한 팀을 이뤄 도쿄에서 하코네까지 왕복 200km를 달리는 ‘하코네 에키덴’이 열리면서 관광객과 취재진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죠. 하코네 에키덴은 요미우리 신문사와 간토* 학생육상경기연맹이 공동 주최하는 대학생 릴레이 마라톤 대회입니다.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수도권 지역
마라톤 대회가 펼쳐지는 이틀 동안 하코네에는 1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몰리고, TV 시청률은 30%에 육박합니다. 다매체·다채널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견줄 만한 기념비적인 기록이죠. 일본에서는 “하코네 에키덴을 봐야 새해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습니다.

각 학교 이름이 적힌 띠를 두르고 릴레이로 달리는 하코네 에키덴 / 사진: KYODO
일본 국민의 높은 관심과 대학 간 치열한 경쟁 덕분에, 하코네 에키덴의 광고 효과는 막대합니다. 일본 PR 리서치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우승 대학의 광고 효과는 약 130억 원, 후원 기업의 광고 효과는 600억 원에 달합니다. 메인 스폰서인 삿포로 맥주는 매년 약 100억 원을 후원하고 있으며, 이 같은 후원금 덕분에 간토 학생육상경기연맹은 개최 비용을 제외하고도 매년 약 30억 원의 수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하코네 에키덴이 특별한 이유는 경쟁의 바탕에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이겨내고 달리는 학생, 부진한 기록에 책임감을 느껴 1년을 휴학하고 훈련에 매진한 학생 등 기록보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사연에 더 많은 응원이 쏟아집니다. 대회 기간 동안 마을 상점들은 대학별 깃발을 내걸고, 자원봉사자들은 관광객들과 함께 진심을 다해 호흡합니다. 온천 스튜빵 같은 지역 명물은 금세 동이 나죠.
하코네는 이 대회의 영향 덕분에 겨울 비수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습니다. 2024년 하코네를 찾은 관광객은 2,000만 명을 넘어섰고, 이틀간의 대회는 1년 동안 마을에 원동력을 불어넣는 ‘축제의 경제’를 만들어냅니다. 하코네 에키덴은 마라톤이 도시를,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찾아온 달리기 붐
이제 한국에서도 달리기가 새로운 도시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내 러닝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었고, 1년 동안 열리는 마라톤 대회만 400개가 넘습니다. 춘천마라톤, 경주국제마라톤, 제주국제마라톤은 이미 대표적인 오픈 대회로 자리 잡았고, 반려견과 함께 달리는 ‘댕댕런’, 완주 후 빵을 받을 수 있는 ‘빵빵런’ 같은 이색 대회도 생겨나고 있죠.
한국의 마라톤 대회도 앞으로 ‘엘리트 러너들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들의 스토리’로 채워져야 합니다. 기록이 아닌 이야기로 완주하는 마라톤이야말로, 도시를 움직이는 진짜 이벤트로 자라날 겁니다. 뉴욕 시티 마라톤과 하코네 에키덴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Edit 윤동해 Graphic 이은호 최서윤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스포츠 기자로 일하던 중, 스포츠가 사회문화 현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됐다. 늦은 나이에 영국 DMU(드몽포트) 대학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야구의 나라》, 《스포츠문화사》, 《세계사를 바꾼 월드컵》과 《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 c. 1910~2002》 등이 있다.
필진 글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