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람들은 무엇을 행복이라고 불렀을까?
다윈은 1872년 발간된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분노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던 행위의 자취이고, 혐오는 독이 든 음식을 게워내던 행위의 자취이며, 사랑은 성행위의 자취’라고 말했습니다.¹ 인류는 오래전부터 감정의 기원을 묻고, 그 실체와 의미를 이해하려 애써왔지요. ‘행복’ 또한,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유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행복에 대한 고대인의 생각을 살펴보려면, 특히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생각한 법과 정의, 용기, 운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간단히 더듬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법에 대해 질문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지식을 ‘법학Jurisprudentia’이라 불렀습니다.² 법(Jus)을 탐구할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다루는 신중함(prudentia)을 곧 법학으로 여긴 것이지요. 로마인들에게 법은 ‘공존의 정의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사회적 실천’이었던 셈입니다. 현대의 시선으로 로마법을 보더라도 놀라운 부분입니다.
이탈리아어 ‘디리토diritto’와 스페인어 ‘데레초derecho’는 ‘법’을 뜻하는 동시에,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 즉 직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직선은 단 하나뿐입니다. 두 점을 연결할 수 있는 곡선이나 꼬인 선은 무수히 많지만, 옳은 것은 하나이고 그른 것은 여러 개입니다.³ 여기에서 또 다른 어려움이 파생됩니다. 직선만을 옳다고 여기는 순간, 직선 이외의 것은 모두 그르다고 여기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른 것은 다수이고 옳은 것은 드문 현실 속에서 플라톤 전통은 법을 ‘존재의 발견scoperta dell’essere’으로 정의합니다. 존재의 발견이란, ‘있는 것은 있다’라고 말하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⁴ 가령 ‘죄가 있으면 있다’고 말하고, ‘없으면 없다’고 말하는 단순한 진리인데 현실에서는 그것이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케네디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단테가 말하길,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단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의 앞에, 혐오 앞에 인간은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 피우게 할 뿐이니까요. 현대 사회의 행복이라는 관념은 개인의 느낌과 기분만이 아니라, 사회적 행복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이런 고찰이 우리에게 날카롭게,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있는 것을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용기’일 것입니다.
고전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안드레이아ανδρεία’라고 부르는 용기는, 라틴어로 ‘힘, 용기’를 의미하는 ‘포르티투도fortitudo’라고 불렀는데, 이는 미덕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포르티투도는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죽음마저 달갑게 맞이하는 순교자들의 미덕으로 보았습니다. 혐오, 죽음, 돈, 노후 등과 같은 인간의 취약성에 굴복하지 않도록 돕고, 수많은 유혹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힘이 미덕이지요. 우리가 이 미덕을 찾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⁵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라틴어는 여러 단어로 행복을 나타냅니다. 베아티스beatis, 베아툼beatum, 그리스어를 음역한 에두대모니아eudaemonia, 파우스티타스faustitas, 펠리치타스felicitas, 프로스페리타스prosperitas, 베아티투도beatitudo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 펠리치타스는 ‘행운, 번영, 성공’을 의미하는데요. 고대 로마에서 펠리치타스는 농사의 풍요, 전쟁에서의 승리, 국가의 번영 같은 공공적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행복의 뜻도, 모양도 참 다양하지요?
이 많은 행복을 나타내는 단어 가운데 제가 주목한 것은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단어입니다. 베아티투도는 ‘베오(beo)’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베오는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베아티투도’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의해 행복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곧 존재의 태도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⁶
앞서 우리는 고대인의 시선을 따라, 법과 정의 그리고 용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고대인들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주목해 볼 차례입니다. 행복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로마인들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for(포르)’의 과거분사 ‘fatum(파툼, ‘말하여진’이라는 뜻)’을 명사화하여 ‘운명’이란 단어로 사용했고, 여기서 바로 운명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fate’가 유래합니다. 로마인들은 운명이란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운명을 말할 때 fate보다는 destiny(영어), destino(이탈리아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destiny는 ‘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estino(데스티노)’에서 유래했는데, 무의식 가운데 운명은 정해진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듯합니다.⁷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바꿀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지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에 대한 비관은, 현재의 고단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클수록 더 강해집니다. 자기 삶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고 느끼고,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집니다.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부분’을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바로 이 ‘부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결정지을뿐더러 죽음의 의미와 순간까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⁸
삶이 운명적으로 주어진다는 생각은, 천연 양모가 사람의 손을 거쳐 실이 되는 과정에 비유되곤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천연 양모를 실패에 감고, 방추로 실을 뽑아냈습니다. 일정량의 양모가 실패에서 모두 빠져나가면 그만큼의 실이 완성되듯이, 한 사람의 인생도 이런 방식으로 결정되고, 정해진 분량만큼 펼쳐진다고 여겼습니다.⁹ 그래서 삶의 여정에서 부족하거나 비어 있는 부분도 삶의 한 부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모두 결핍이 있고 부재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조건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목표에 도달하고, 이상을 바라보면서 조급한 마음으로 삶의 레이스를 펼칩니다. 행복이 상태라면 그것을 잡기 위해 애써서 행복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그 감정은 잠시일 뿐, 또 다른 고통에 금방 잠식당하고 말 거예요. 곧 사그라들 감정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애달픈 운명인지도 모르지만, 우리 대부분은 쫓아간 무엇인가를 이뤘을 때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행복은 ‘상태’이기보다는 ‘태도’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새로 생겨납니다. 이 질문은 곧,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태도 문제로 나아갑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다시 생각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태도’입니다. 이 태도에 집중해 뚜렷하고 일관된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간다면, 어쩔 수 없는 결핍과 부재는 따르겠지만,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는 때가 필연적으로 옵니다.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할 겁니다. 끝까지 누가 동행해 줄 수도,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오롯이 홀로 가야 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거든요. 하지만 타인의 위로나 응원을 갈구하지 않는 태도, 쉽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는 태도, 혹여 이 과정에 실패한다고 해도 내 인생이 패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들이 모여 나를 지키고 나를 나아가게 합니다.
행복은 그 쓰디쓴 과정에서 간간이 입에 넣을 사탕 같은 것입니다. 곧 녹아 사라질지라도 충전된 당으로 다시 나아갈 힘을 주는 각성의 순간을 만들어줍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탕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그 사탕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존중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달콤함도 인생의 큰 힘이 되지만, 외부 환경이 어떠하든 스스로 좋은 태도를 차곡차곡 쌓아 단단하게 만든 내면만큼 큰 힘은 없습니다. 따라서 다시 말합니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견디고 채워가는 데 필요한 태도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물론 현실은 아래와 더 가깝겠지요.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Paulum dormies paululum dormitabis paululum conseres manus ut dormias! 파울룸 도르미에스 파울룰룸 도르미타비스 파울룰룸 콘세레스 마누스 우트 도르미아스. - 잠언 6, 10; 24, 33
성경 속 이 구절은, 매일 아침잠과 사투를 벌이거나 일상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의 심정을 절묘하게 대변해 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제대로 살아가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마음의 잠을 깨우라는 반어적 표현으로도 다가옵니다.
행복은 태도라고 말했지만, 그 태도를 지속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거예요. ‘그 태도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나요?’ 저는 여러분께 ‘나를 살리는 1분’을 권하고 싶습니다. 지치고 꺾이고, 또 여기까지인가 생각이 들 때, 잠시의 멈춤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단 1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스스로에게 새로운 평가를 주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물론 우리는 타인의 평가와 재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는 1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1분 동안 나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쳐 잡고, 스스로를 일으킵니다. 의기소침해지고 ‘여기까지인가?, 이제 그만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 때, 아주 짧은 1분을 이렇게 채워봅시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위대함과 신비함이 내 안에 있어”
사람마다 저마다의 귀함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인인유귀어기자 불사이¹⁰ - 맹자
저마다의 고귀함을 자각하면서, 찡그린 얼굴을 펴고 웃음을 지어보려고 해보세요.¹¹ 행복은 이런 단순한 행위를 의식하면서 반복하는 일상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날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제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다시 길을 가기 위해, 다시 길을 걷기 위해.
*이 글을 씀에 있어 필자의 저서 《라틴어 수업》과 《라틴어 인생문장》에서 인용한 글이 있음을 밝힙니다.
Edit 이지영 Graphic 요이한 ✱커버 그래픽: 고대 철학자들의 얼굴이 구름처럼 하늘에 떠 있는 장면 속, 한 사람이 언덕에 앉아 사색에 잠깁니다. 곁에 놓인 스마트폰은 잠시 잊은 채, 자연과 사유에 집중합니다. 고대의 지혜를 따라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다시 묻는 현대인의 태도를 표현했습니다.
700년 역사상 한국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의 변호사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00쇄를 돌파한 메가 스테디셀러 《라틴어 수업》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외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한동일의 공부법 수업》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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