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된 일상 속 물건들

“불안할 때 나는 맑고 산뜻한 걸 찾지 않는다”

고아성

9분

“토스에서 저를요?” 인터뷰 요청은 의외였다. 금융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었다. 그런데 안정감에 대해서, 안정감을 지탱하는 습관이나 자립하는 힘에 대해서라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고민해온, 내 인생 최대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안정형 인간 같다고 한다. 이 바닥에 있는 사람치고(?) 붕 떠 있지 않다는 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날은 그 말이 조금 무서웠다. 흔들리는 속내를 들킬까 봐. 나는 오래 불안했다. 미성년자일 때도, 20대 내내도 그랬다. 30대가 되고 나서는 안정감이라는 게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안정감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쟁취의 기록에 가깝다. 대단한 결심 같은 건 없었다. 대신 매일 반복한 것들이 있었고, 가끔 나를 야생에 던지는 시도를 했고, 흔들리는 시기마다 곁에 둔 문장과 장면이 있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불안의 불씨가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현실을 살아내지 못할까 봐”가 컸다. 내 또래 친구들이, 혹은 어른이 된 사회인들이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는 어떤 현실감을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한테만 비어 있는 감각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부분을 굉장히 경계하면서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20대 때는 하도 불안하길래 왜 이럴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릴 때는 루틴이 주어진다. 학교가 있고 학원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을 하고 밤에는 자야 한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그게 사라진다. 루틴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한꺼번에 겹쳐서 찾아온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다들 비슷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될지 몰라서 고민인 와중에 내 커리큘럼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 그 책임감이 아득한 무게로 다가왔다. 지금은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내 커리큘럼을 스스로 만드는 일에서 효능감을 느낀다.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고 다루는 법을 익혀 가고 있다.

불안할 때 나는 맑고 산뜻한 걸 찾지 않는다

이건 최근에 깨달은 건데 나는 안정감을 찾으려고 긍정적이고 산뜻한 것을 찾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불안한 것을 들여다본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의 안정을 준다.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문장이 아니라, 나만큼 흔들리는 문장을 읽는 게 좋다. 박완서 선생님도 그렇다. 인간의 가장 너절한 부분, 그 면면을 파헤치는 분이다. 내면이 조금 흔들릴 때 박완서 선생님 책을 읽는다. 거기 그려진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받는 부분이 많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덧붙이고 싶다. 내가 연기한 자영이는 강인하고 소신 있는 인물이지만 불안함이 부재하는 캐릭터는 결코 아니다. 매사 불안하고 두렵고 겁도 나는데, 너무 겁이 날 때 그냥 눈물 한 번 찔끔 흘리고 딛고 나아간다. 그 캐릭터를 통해 개인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보시는 분들이 이 초라한 것들을 왜 응원하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기를 바라면서 연기했다.

2.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하는 일

살면서 가장 떨렸던 순간은 3·1절에 광화문에서 “아리랑”을 부른 때였다. 〈항거: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 열사를 연기한 뒤였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어떤 스태프분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TV를 틀면 어느 채널에서도 네가 노래하는 게 나올 거야.” 가벼운 행사가 아니라는 경각심을 주려던 말이었을 것이다. 더 떨렸다.

백스테이지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함께 올라간 배우들 중에는 청심환을 드신 분도 있었다. 나는 왠지 그런 도움 없이 내 온전한 긴장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보고 싶다는, 패기 있는 마음을 먹었다. 그랬더니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하나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냥 한계에 부딪혀 버리는 것이 도움되는 때도 있다는 걸 배웠다.

손에 잡히게 만드는 일

뭐든 손에 잡히게 만드는 것이 좋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필름과 테이프로 시작한 세대다. 영화는 필름으로 찍었고 드라마도 테이프에 찍었다. 작품이 끝나면 한 1년쯤 뒤에 비디오나 DVD를 받았다. 그걸 책꽂이에 꽂으면서 생각했다. 이것도 이제 끝났다. 무사히 끝냈다. 그게 나만의 루틴이었다.

그런데 OTT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그 루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내가 찍은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가 함께 만든 작품인데도.

그 이후로 피지컬에 더 집착하게 된 것 같다. 아날로그 세대 끝자락으로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꼭 따로 끄집어낸다. 내 공간에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해놔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그 문장이 평소에 내 뇌리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일기도 쓴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쓴다. 습관이기도 하고 기록에 가깝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일기를 보면 거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써놨다는 점이다. 오늘 뭘 했는데 무엇에서 좋은 점이 느껴졌다, 그런 식이다. 그렇게 쓰다 보면 내가 무엇에 감사함을 느끼는지, 무엇에 행복해하는지를 더 잘 알게 된다. 매 순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몸이 기울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기는 확실한 기능을 한다.

린넨 이불과 가죽 소파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루틴을 묻는다면, 활동이라기보다는 취향에 가깝다. 나는 꼭 린넨 이불과 가죽 소파여야 한다. 어렸을 때는 취향을 몰랐다. 내가 까다롭다는 짐작은 어렴풋이 했지만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어른이 되고 세월을 겪다 보면 이런저런 소파에 앉아볼 일도 생기고 경험이 많아진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리는 중이다.

사람이 가장 편한 공간이 소파와 침대인데, 린넨과 가죽의 조합이 주는 행복이 있다. 취향은 앞으로도 변하겠지만,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인지하게 됐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프라이팬으로 원두를 볶는다

요즘의 취향은 커피다. 커피는 오래 좋아했지만 스스로 만들어 먹을 생각은 안 했는데, 얼마 전부터 로스팅을 시작했다.

처음엔 실수였다. 나는 인도 로부스타 원두를 좋아하는데, 인도 공항에서 경유하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원두를 샀다. 그런데 생두를 사버린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알아봤더니 집에서 볶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볶아봤다. 로스터를 산 건 아니고 프라이팬으로 한다. 김치를 집에서 담그면 겉절이의 맛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갓 볶은 원두도 그렇게 신선한 맛이 난다. 다만 일주일 정도는 묵혀둬야 한다. 내가 원하는 정도의 다크함을 내기까지는 숙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정말 완벽하게 낼 수 있다.

원두를 볶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드립 커피를 내리는 것도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손을 움직임으로써 좋아하는 것에 가까워질 때만 오는 만족감이 분명히 있다.

3. 혼자 서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야생에 던지는 선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연기를 시작한 것부터가 그랬다. 내가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때는 일종의 매뉴얼이 있었다. 매니지먼트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라 유명 연기 학원을 통해 시작하는 게 정해진 길이었다. 나는 그 학원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오디션으로 시작했다. 아마 그때가 첫 야생 경험이 아닐까 싶다.

대학에서 연기가 아닌 심리학을 전공한 것도 그랬고, 이번에 회사 없이 활동하는 것도 그렇다. 올해 초부터였으니 이제 1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단순히 매니저가 없다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20년 만에 상영하는 법을 배웠다

올해는 〈괴물〉 20주년이다. 영화 데뷔작인 〈괴물〉은 내게 너무 특별한 작품이라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빨리 잊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20주년이 됐으니 스스로에게 좀 너그럽게, 정면으로 마주해보자 싶었고, 그 영화를 OTT나 TV가 아니라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욕심이 났다. 극장을 빌려서 상영해 보기로 했다.

영화제나 특별전 상영에 참석해본 경험은 많지만 그걸 어떻게 주최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제작사 대표님, 배급사 쇼박스, 봉준호 감독님까지 절차를 거쳤다.

PEM 파일(영화 배급사에서 보안이 유지된 서버로 영화 데이터를 수신할 때 사용하는 보안 인증서/키 파일)을 받아서 극장 엔지니어에게 전달하고 영사실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파일을 알파벳 그대로 읽으며 “피이엠 파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엔지니어분이 “펨 파일”이라고 다시 말해주셨다. 아, 저렇게 읽는 거구나.

영화를 20년 했는데 상영하는 법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은 이런 자립의 성취감에 많이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무엇 하나 쉬운 건 없다. 그래도 그것마저 즐기면서 파헤쳐 나가고 있다.

효능감은 유능함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큰 기쁨은 효능감이다. 내가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 그걸 이루려면 자립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만 이 효능감이 유능함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최근에 영국에 다녀왔는데 런던에서 운전을 했다. 운전석이 반대쪽에 있는 게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웠는데 점점 감을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틀쯤 되니 익숙해졌고 그게 또 행복했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더라도 곳곳에 이런 작은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내가 계획을 해야겠구나. 어른으로 잘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를 알게 된 기분이다.

4. 안정감이 있는 장면

인터뷰를 앞두고 생각해봤다. 내 안정감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 같다. 첫 번째는 경제력이다. 단순한 돈이나 자산이 아니다.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능력, 앞날이 어찌되더라도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겠다는 작은 확신. 그게 일단 기저에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내 취향을 아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도처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내 취향을 꾸준히 파악하려고 한다. 취향은 유동적이라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시시각각 면밀히 따라가야 한다.

세 번째는 계획이다. 철저한 계획은 아니다. 다만 당장 내 앞에 다음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안정감이 들지 않는다. 프리랜서로서의 숙명인 것 같기도 하다. 다음 프로젝트를 마련해두고 휴식을 취할 때 그 휴식이 가장 달콤하다.

세 가지는 따로 있지 않고 서로를 떠받친다. 나는 이 세 가지를 균형감 있게 가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앞으로 개봉할 작품이 세 편 있다. 이럴 때 좀 든든하다. 내 미래를 거창하게 설계한다기보다는, 다가올 것이 있기 때문에 드는 든든한 마음. 나는 그 마음 때문에 계획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글은 배우 고아성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Interview·Edit 주소은, Graphic 변영근, 조수희 Photo 이욱영

진짜 안정감이 필요할 때

고아성 에디터 이미지
고아성

2004년 연기를 시작한 23년 차 배우. 드라마, 영화, 연극, 라디오에서 활동한다. 평온을 위한 루틴과 자립하는 힘을 기르며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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