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마음을 내려놓는 가을 여행지 3곳
요즘은 별일이 없어도 마음이 바쁩니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출근하기도 전에 밤새 도착한 메시지와 뉴스에 마음 한구석을 내어줍니다. 해야 할 일은 끝이 없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합니다. 하루를 무사히 보냈는데도 어쩐지 뒤처진 것 같고, 잠자리에 누워서야 낮에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이 하나둘 고개를 듭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서둘러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잠시 멈춰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시간 말이에요.
여행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떠난다고 해서 삶의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일상에서 몇 걸음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다른 호흡을 되찾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다음 발을 내딛는 일에 집중하고, 습지를 깨우는 작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오래된 성곽에서 수 겹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이런 순간이 쌓이면 어느 순간, 걱정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복잡했던 마음에는 조금씩 빈자리가 생기고요.
어쩌면 여행이 주는 안정감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순간만큼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는 것. 잠시 다른 풍경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고 흐트러졌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요.
그런 시간을 찾아 제천과 고창, 부여로 향합니다.
Spot 1. 제천: 산을 오르다 보면 생각도 단순해진다
충북 제천에 있는 옥순봉은 월악산국립공원이 품은 아름다운 봉우리입니다.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처럼 솟았다고 해서 옥순봉이라 불러요. 해발 283m로 낮은 산이지만, 오르는 길이 마냥 쉽지만은 않습니다. 옥순봉·구담봉 삼거리까지 완만한 오르막을 걷다가 옥순봉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가파른 암릉 구간이 나옵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어요. 밟을 자리를 살피고, 가빠진 호흡을 정리해야 합니다.
산은 한꺼번에 오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속도가 필요하죠.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결국 한 걸음씩 가야 합니다. 한 발짝 두 발짝 나아가는 일만으로도 만족감이 듭니다. 그 사실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해요. 삶의 모든 문제도 오늘 한꺼번에 해결할 필요는 없다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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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면 청풍호 물길과 산자락,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는 묘한 힘이 있어요.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산길도 정상에서 보면 정돈되고, 거대하다 느껴졌던 사물도 작아집니다. 가지고 있던 고민도 자연스레 거리가 생깁니다.
이런 경험을 환경심리학에서는 ‘주의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자연 속에 머물면 일상에서 계속 사용하던 집중력이 잠시 쉬고, 지친 마음과 주의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예요. 어쩐지, 다 이유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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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봉이 원래 낮은 산은 아닙니다. 1980년대 댐이 들어서고 청풍호가 생기면서 봉우리가 가까워졌어요. 정상에선 산 주위로 물이 길게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논과 밭, 생활용수로 제 소임을 다 하겠죠. 제천에는 삼한시대에 만들어져 가장 오래된 저수지, 의림지가 있습니다. 모아둔 물이 관개면적의 13배에 달하는 농지를 다 적셨다고 하는데요. 여름이면 제방 아래 청전뜰 물대기가 한창이었을 모습이 그려져 기특해집니다. 등산 후에는 의림지 주위를 한 바퀴 걸으며 잔바람에 땀을 식혀도 좋겠습니다.
Spot 2. 고창: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는 힘, 회복탄력성
고창 운곡습지는 예전에 ‘오베이골’이라 불렀습니다. 다섯 갈래 길이 나뉘는 오방골을 부르던 전라도 방언이에요. 각지에서 만든 산물이 고갯길을 넘어 오베이골로 모이고 장이 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산비탈을 일구어 계단식 논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구릉 주변에 빗물이 모여 골짜기로 흘러들면 둠벙(‘웅덩이’의 방언)에 고였다가 곰소만 바다로 흘러갑니다. 물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니 풍요로운 땅이었어요.
1980년대 초, 마을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라남도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운곡저수지를 조성했어요. 주민들은 이주했고, 30년 넘게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오베이골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버려진 논에 물이 고이고, 풀이 자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서 저층 산지습지로 회복한 셈입니다. 오베이골은 850여 종의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 거점지역이 되었습니다. 대자연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는 운곡습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람사르습지*로 지정될 만하죠? *생물지리학적 가치가 높거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해 '람사르 협약'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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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유적지에서 운곡습지 생태연못까지 왕복 3km 거리를 걸으면 잊었던 감각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목적과 효율도 없이 걸으니 그저 오르고 거닐다 돌아오면 됩니다. 가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받은 자극에서 잠시 멀어지는 일이었나 봅니다.
‘자연스럽다.’ 사전에선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는 뜻이래요. 순리는 잘 먹고, 잘 자는 일 같습니다. 그러려면 걱정과 고민을 덜어내고, 오래된 염려는 흘려보내고 서두르지 않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자연이 만드는 리듬에 맞춰 걷다 보면 여기서 생기는 안정이 있습니다. 무한한 회복탄력성이 살아 숨 쉬는 운곡습지에서, 자연의 속도로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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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 3. 부여: 오래된 시간 곁을 걷는다는 것
오래된 공간을 여행하면 내가 살지 못한 시간을 조금 빌려 사는 기분이 듭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읽을 때와 비슷해요.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까지 함께 만나는 일이라고 했지요. 오래된 장소도 그렇습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이미 나고 없을 테지만,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봅니다.
백마강과 맞닿은 부소산에는 부소산성이 있습니다. 해발 106m의 나지막한 산으로 왕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위급할 때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했습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방어 형태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를 지켰던 최후의 보루였어요. 부소산성에는 건물과 용수시설, 곡식을 보관하던 군창지도 있는데요. 한 나라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대비했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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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걸으며 그때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불안한 일이었을 겁니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누군가는 오늘 저녁 먹을 것을 생각했고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겠지요.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절박했던 시간도 결국 지나갔습니다. 그때는 세상의 전부였을 걱정도 지금은 오래된 성터 어딘가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았고요. 오래된 곳에서는 가끔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걱정에도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꽤 위로가 됩니다.
부소산성은 대부분 흙을 쌓아 만든 토성입니다. 질이 다른 흙을 얇게 깔고 여러번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을 이용해 단단하죠. 마음도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단단해지는 사람은 드뭅니다. 흔들렸다가 돌아오고, 한번 견뎌보고, 또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는 시간이 한 겹씩 쌓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날들도 어쩌면 그런 판축의 과정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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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루에 올라 부여 시내를 내려다봅니다. 누마루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들어옵니다. 한동안 구겨진 채 접혀있던 마음 한쪽이 까슬까슬하고 빳빳해지는 것 같습니다. 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네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밀린 일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고, 미뤄둔 고민도 다시 찾아오겠지요. 그래도 여행을 다녀온 우리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을지 모릅니다.
여행에서 가져오는 것이 꼭 사진이나 기념품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산을 오르며 한 걸음씩 가도 된다는 걸 알았고, 습지를 걸으며 다시 제 모습을 찾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오래된 성곽에서는 지금의 걱정 역시 언젠가는 지나갈 시간이라는 걸 생각했고요.
잘 쉬었다는 감각.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마음. 그 정도를 챙겨올 수 있다면 여행은 제 몫을 다한 것 같습니다.
세 곳을 둘러보며 느낀 건, 소도시 여행은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마주하고,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여행의 좋은 장면이 되어주니까요. 이번 가을에는 이름난 여행지 대신 조금은 느린 속도로 국내 곳곳에 숨겨진 매력을 찾아보는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한국관광공사에서도 가을을 맞아 ‘여행가는 달’ 캠페인을 통해 국내 곳곳의 다양한 여행지를 소개하고, 교통, 숙박, 여행상품 등 여행을 조금 더 가볍게 떠날 수 있는 혜택 제공한다고 합니다. 올가을 어디로 떠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여행가는 달’에서 마음에 드는 다음 여행지를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Write 송윤경 여행작가(소도시트래블) Photo 한국관광공사
*이 콘텐츠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안정감을 찾아줄 콘텐츠를 매달 전해드릴게요. 불편을 해결해온 토스와 함께, 불안까지 해결해 나가요. Find Your Safe Zone: 토스 안정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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