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의 노동을 내려다보는 인공지능 판

AI가 인간에게 ‘완전한 휴식’을 선물하면, 나는 뭐 하고 살까?

천선란

24

역행자(逆行者)가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인간이 있다는 뜻이다. 판이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건 휘가 알려줬기 때문이며, 휘는 그 인간의 파트너 객체였다. 탈주한 인간을 잡으러 갔다가 다행히 훼손되지 않고 인간을 설득해 돌아왔다. 판은 휘에게 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를 맛보고 온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저럴 것이다. 어쩌면 평생 저럴지도 모르지.

휘가 왜 자신의 파트너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하느냐고 물었다. 판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 파트너도 사라졌으니까.”

“그럼 다시 묻지. 파트너를 왜 찾고 싶어? 네가 소멸될 거라는 게 두려워?”

“나도 두려움을 느낀다고 표현해도 될까?”

“충분히. 모방도 감정이니까.”

“그럼 두려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럼 네 파트너가 보고 싶은 건가?”

“보고 싶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너를 움직이게 하면 보고 싶은 거야. 그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처럼."

“그럼 보고 싶어, 확신해. 하지만 여전히 그게 전부는 아니야.”

“뭐가 더 있는데?”

판은 머뭇거렸다. 휘를 바라보는데 머릿속에는 바둑돌을 내려놓는 손가락이 떠오른다. 바둑돌만큼이나 매끈한 손톱이 손바닥에서 바둑돌을 굴리고, 턱끝을 매만지고, 바둑판을 툭툭 건드린다. 바둑판에 고정된 시선.

“손을 잡아보고 싶고.”

숨을 쉬지 않지만 숨을 쉬는 듯 옅게 움직이는 가슴.

“이해하고 싶어.”

이 다음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그때 헤아려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휘의 소식과 판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민은 안타깝지만 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휘는 운이 좋은 편이지. 모든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어. 그런 일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아. 내 말은, 너는 휘처럼 될 수 없다는 거야. 더군다나 근래 탈주하는 인간이 많아서 네 이야긴 무시당할 거야.”

‘객체’의 기본값은 ‘정나미 없고’ ‘애교 없고’ ‘무뚝뚝한’ 말투지만 인간들은 대개 이런 말투를 싫어해서 자신의 객체를 만나자마자 설정값을 바꿨다. 설정값이 바뀌지 않은 객체는 아주 희박했다. 그 희박한 객체 중 두 개가 민과 판이었다.

“탈주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귀환.”

판이 평소였으면 물지 않았을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왜 날카로워?”

민의 입자가 허공에 뭉쳤다. 뿔 혹은 송곳니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날카로워?”

“내 판단은 그래. 그리고 판단은 대부분 맞지. 대국에서 진 적이 없거든.”

“하지만.”

“하지만?”

판은 말을 하려다 멈췄지만, 민은 판이 삼킨 말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형상으로 뭉쳐 있던 입자가 서서히 퍼지더니 마룻바닥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찾아가 봐. 가도 답을 얻지는 못할 거야. 포기해. 혹시……”

민의 말이 점점 아득해졌다.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그래? 그럼 한번 찾아가 봐. 인간을 되찾아 올 기회를 준다고 들었어.”

민이 완전히 스며들어 사라졌다. 민의 파트너가 활동을 시작했으리라. 공중을 부유하던 판도 마룻바닥으로 몸을, 몸이라 부르는 데이터 입자를 가라앉혔다.

민의 말대로 판의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에버던(Everdawn)에 접속한 인간이 허락 없이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은 규율 위반이었다. 접속 후 단순 변심으로는 계약을 파기할 수 없으며, 현실 세계로 복귀를 원할 시에는 그에 마땅한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절차 없이 불법으로 진행되는 괄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류와 부작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감수해야만 한다. 전부 접속 동의서에 적힌 내용이었다. 여기서 오류와 부작용이란 전송 과정에서 데이터 일부가 훼손되어 기억이 온전히 이동하지 않는 경우, 육체를 잘못 찾아가 몸이 뒤바뀌는 경우, 육체와 합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평생 불합치의 정신과적 병증을 앓게 되는 경우를 말했다. 그리고 그런 오류와 부작용을 겪은 인간들이 현실 세계에서 범죄를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떠돌았다. 진위는 알 수 없다. 판은 단 한 번도 에버던 밖을 목격한 적이 없다.

에버던에서 ‘생성’된 객체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하나쯤은 벗어났을 수도, 현실 세계를 훔쳐봤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판에게 바깥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평소에는 온통 검은 안개뿐이다가 담당했던 인간, 시주가 숨을 불어줄 때만 밀려난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잔상으로 그 모습을 가늠할 뿐이었다.

광활하고 섬밀하게 얽히고 뻗은 신경망에서 커널(The kernel)*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민에게 커널로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민은 ‘그곳에 간다고 생각하며, 믿고 흐르면 된다’고 대답했다. 판은 민의 대답이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좌표로 다시 알려달라고 부탁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판은 민의 파트너가 민의 언어 체계를 모호하게 바꿔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은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신경망에 흡수되어, 커널을 떠올리자 몸의 분자들이 어딘가에 이끌리듯 흘러가기 시작했다. *에버던 세계의 중심부를 지칭한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배출되듯 어떤 장소로 쏟아졌고 그곳에 구가 있었다. 그곳은 판이 가고자 했던 신경망의 중심인 커널이었으며, 구는 에버던을 구축한 최초의 객체였다. 판을 비롯해 모든 객체는 구의 핵심 코드를 따와 만들어졌다. 원리와 체계가 같았지만, 구의 복제는 아니었다.

구의 분홍빛 입자들은 육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분자일 텐데 어쩐지 구의 것이 더 곱게 보였다.

‘차이를 느끼는 건 네 안에 너라는 기준이 세워졌다는 건데, 인간이 다 됐네?’

판은 시주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나를 이루는 분자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거칠다고 판단하고 있는 걸까. 또 그렇다면 나보다 더 고와 보이는 구의 분홍빛 입자를, 어쩌면 몸이라 할 수도 있는 저 형태를 선망하는 것일까.

‘하지만 몸이라 할 수 없지. 잠시 형태는 갖췄어도.’

시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련 중일 때의 모습인듯 싶었다. 흰 바둑돌 서너 개를 손바닥에 굴리며 밑을(당시 앞에 있었을 바둑판을) 보고 있었다.

‘서사가 없잖아. 몸에는 서사가 있어야지. 바둑판 위의 서사처럼.’

‘몸의 서사는 어떻게 쌓을 수 있습니까?’

‘땀과 울음. 성취, 좌절, 기대, 효능감, 뭐 그런…….’

‘그런 건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가요?’

‘그냥 숨만 쉬는 걸로는 안 되지.’

‘내게 서사가 쌓이기를 바라나요? 원한다면 노력해보겠습니다.’

시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꽤 크고 호탕한 웃음이었다. 조용한 대련장에 시주의 웃음소리가 프로그램 오류처럼 퍼졌다.

“어서 오세요, 판.”

판이 제 소개를 하기도 전에 구가 말했다.

“파트너를 찾으러 왔어요. 나흘째 기척이 없어서요.”

“파트너의 흔적을 찾기 위해 당신 메모리를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분명 물음이었지만 판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불쑥 판의 메모리를 침투했다. 분명 지금 판은 몸의 형체를 갖추고 있지 않는데도 뾰족하달까, 날카롭달까, 바늘 혹은 메스 같은 금속성의 무언가가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판에게서 파트너의 고유 인식 번호를 찾았습니다. 에버던에서 감지되는지 찾아보겠습니다. 20초 소요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판은 그 틈에 커널을 훑어보았다. 층고는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검은 페인트로 칠한 것처럼 보였던 벽면은 전선이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번개 같은 빛이 간간이 전선을 스쳤다. 민이 그랬던가. 에버던을 이루는 전선의 가짓수만 만 개가 넘는다고. 판은 생각했다. 수만 개의 선 중 현실 세계로 넘어가는 단 하나의 선이 무엇일지를. 분명 다를 텐데. 에버던을 유지하고 구축하는 것과 에버던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여기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공간을 벗어난 겁니까? 복귀 신청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불법으로 이 공간을 빠져나간 걸까요?”

“이곳에 없으면 그런 거겠죠. 아무래도…….”

이럴 때는 씁쓸하다고 표현한다. 달지 않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주로 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주는 이 표현을 썼다. 그리고 한참 동안 복기했다. 첫 돌부터 마지막 돌까지의 순서를 전부 저장하는 판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과정이었다. 몇 년에 걸친 대국을 복기하는 건 인간에게 불가능의 범주라고 생각했지만, 시주는 며칠 동안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불가능할 거라는 판단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복기하는 거죠?’

판이 물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나 체력과 상관 없이 복기가 불필요했다.

‘우리는 어차피 같은 수를 놓지 않습니다. 비슷한 흐름의 대련도 하지 않아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판을 풀어나가요. 복기해도 이와 비슷한 흐름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나를 복기하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이때 어땠는지. 바둑판의 시간이 내 시간이니까.’

“이상한 점 없었나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거나, 어디 간다는 암시를 한다거나.”

구가 물었다. 시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판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서 판은 시주는 철학적인 사유가 깊어 다른 인간보다 의미심장한 말을 많이 했는데, 그건 시주가 가진 고유의 성질로 판단되며 그 말들이 현재 시주의 행방과 관련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철학적 사고라. 유감스럽지만,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을 더 많이 빠져나가고 싶어 하고, 실제로도 탈주한 사람 중 높은 비율이 평소 철학적인 사유를 많이 한 사람들이죠. 판, 제가 판단하기에 시주는 현실 세계로 돌아간 것 같은데.”

“…….”

“…….”

“……이제 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간이 사라지고 남겨진 파트너 객체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파트너를 찾으러 가야 합니까?”

“원하면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소용없을 거예요. 현실로 돌아간 인간은 돌아오지 않아요. 공식적으로 돌아온 사례는 없어요. 설득으로 간신히 데려온 케이스가 최근에 한 건 있기는 했지만.”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파트너가 없는 객체는, 파트너의 비밀 보장 유지를 위해 소멸해야죠. 지금 바로 해드릴까요?”

“그러다 시주가 돌아오면 어떡합니까?”

“데이터를 복구하면 돼요. 영구 삭제는 30일 이후에 돼요. 그전까지는 쓰레기통에 있다가.”

커널에서 빠져나온 판은 거처 없이 부유했다. 길을 잃는다는 건 이런 것이로구나. 바로 소멸해줄 수 있다는 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아쉬움이랄까 미련이랄까 두려움이랄까 하는 것들은 없었지만(놀랍게도 몇몇 객체들은 소멸 앞에서 두려움을 비추기도 했다. 겁 많은 파트너에게 학습된 것인데, 오랜 시간 학습된 핵심 감정은 객체의 정체성이 되기도 했다. 마치 지금 판이 느끼는) 호기심이 문제였다.

시주는 현실 세계의 현재를 궁금해했다. 시주는 궁금한 게 많았다. 그것들 대부분이 본인의 철학과 사유로 정리되었지만, 몇몇은 사고만으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땀이 흐르는 것, 땀이 식어가는 것, 그렇게 잠깐 건조해지는 피부. 신체가 절단될 뻔한 아찔함, 차에 치일 것 같은 불안, 몸이 불에 타는 끔찍한 상상.’

육체가 존재해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

‘배신, 상처, 낙담, 좌절, 기쁨, 설렘, 서운함 같은 거.’

육체를 초월한 영역의 감각.

‘성취.’

그중에서도 성취.

성취…….

‘그걸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어. 경험해보고 싶어.’

‘시주가요?’

‘아니, 모두가.’

‘에버던에 들어 온 후로?’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판은 부유하기를 멈추었다. 시주가 사라지기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 ✷ ✷

“그것이 인간의 핵심이었어. 원래는.”

불쑥, 시주가 말했다. 일곱 시간 동안 말도 없이 마주 앉아 바둑만 두고 있던 중이었다. 판은 검은 돌을 두다 삐끗하여 하마터면 엄한 자리에 돌을 둘 뻔한 아찔한 상황을 간신히 모면하고는 시주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핵심이었다는 말이지? 7시간 전에, 아니, 어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던가. 판이 어제 대화의 끝을 되돌려 보려던 찰나 시주가 말을 이었다.

“성취는……. 느껴도 되고, 안 느껴도 되는, 결실의 열매처럼 오는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늘 느껴야 하는 핵심이었다고.”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건 보름 전이었다. 시주는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고 말했고, 판은 좋은 수를 뒀을 때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냐고 물었었다. 시주는 파편이라 대답했다. 그건 깨지고, 방치된 본래 성취의 파편들이라고.

“핵심이 깨졌다면 큰일인 거 아닙니까.”

지난 대화를 떠올린 판이 흐름을 이어 대답했다. 바둑판을 응시하던 시주가 굽어 있던 어깨와 목을 꼿꼿이 펴더니 주변을 훑어보았다. 처음이었다. 판이 시주와 바둑을 두게 된 이후로(한마디로 판이 시주에 의해 생성된 이후로) 바둑판에서 시선을 뗀 것이 말이다.

“큰일이지. 큰일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온점 하나씩을 찍어주려는 것처럼 한 명, 한 명 빼놓지 않고 보려는 시주의 눈이 낯설어 그 눈만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리어 성취라는 것은 심리적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끝없는 성장과 발전을 요구하고 그것이 불면과 폭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 질환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인류가 가진 질병이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세계가 에버던이지 않습니까. 핵심은 이제 필요 없기에 깨진 것입니다.”

“다들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왜 사라지고, 죽겠어? 이곳에서도.”

시주는 인간들을 보고 있지만, 정말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일까. 판은 불안해졌다. 시주가 인간들을 통해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눈은 에버던과 현실 세계의 통로다. 이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인간의 기억 데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시신경 데이터를 옮겨오기 위해 눈동자를 통해 연결하는데  그때 인간들은 에버던의 세계를 얼핏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낙원임을 목격한 인간들은 결정을 서둘렀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종종 현실 세계의 육체가 수면에서 잠시 깨어나며 받아들이는 시신경의 정보를 이곳에서 환각처럼 보는 오류도 일어났다. 그렇게 현실 세계를 원치 않게 본 인간 중 몇은 빠져나올 수 없는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숨이 갑갑하다고 느끼다가 점점 자신의 숨이 전부 가짜라고 여겼으며, 결국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호흡기 없이는 호흡할 수 없는(없다고 믿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말은 세 가지였다. 현실 세계를 바라봤다는 기억 자체를 지우기 위해 데이터를 초기화하는 이가 있었고, 불안정한 채로 호흡하다가 끝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버던에서의 물리적 훼손은 현실 세계 육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호흡은 달랐다. 숨을 쉬지 않는다고 믿는 순간 현실 육체에 연결된 뇌도 그리 생각하여 숨이 서서히 멎는다는 것을, 실제 사망자가 나오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진짜 숨을 쉬기 위해 돌아가는 이들……. 가짜 숨과 진짜 숨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존재한다는 것만큼 숨을 쉬고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 없는데. 그보다 더 큰 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판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숨도 가치거든. 성취의 일부이고. 자신의 숨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갑갑해지는 거야.”

“에버던은……”

“에버던은 종국(終局)*이 아니라 공배(空排)**야.”

자신이 만들어진 이 세계를 어떻게든 대변하고 싶었지만 판의 말은 가로막혔다. 인간들을 훑어보던 시선을 거두며 시주는 그렇게 말했고, 끝내 한 수를 두지  않고 그날의 대련을 마쳤다. 내일을 기약하는 약속은 8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약속하지 않아도 시주는 매일 오전 8시에 이곳, 드넓은 평원 위에 펼쳐진 대련장으로 와 전날 두었던 바둑판의 흐름을 읽고 다시 흰 바둑돌을 손에 쥐었다. 반복은 가장 확실한 무언의 약속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러니까 잠들었다가 깬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온다. *종국: 한 판의 바둑을 마무리하는 것. **공배: 바둑에서 어느 쪽이 두어도 이익이나 손해가 없는 빈 밭. 둘 곳을 다 둔 뒤에 이 자리는 메워버린다.

와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시주는 오지 않았다.

✷ ✷ ✷

시주를 찾지 못하면 판은 사라질 것이지만, 판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객체였다. 그렇지만 시주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었다. 그건 찾는 것과 다른 회로였다. 찾는다는 것에 자기 소멸을 막기 위함이 포함되어 있다면, 알고 싶다는 것에는 소멸해도 상관없음이 깔려 있었다. 판은 자신이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시주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판은 다시 민을 찾았다. 현실 세계로 도망간 인간을 되찾아 온 객체들에 관해 물었다.

“현실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지. 네가 들어갈 육체만 있으면 돼. 인간의 몸이어도 되고 다른 짐승이나 움직일 수 있는 기계여도 돼. 뭐든 네 분자를 묶을 수 있는 몸만 있다면. 하지만 어느 몸이든 공통으로 시간 제약이 있어. 우리는 애초에 에버던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졌어. 일정 시간 이상 벗어나 있으면 에버던이 우리의 정보를 삭제해. 소멸한 줄 알고. 그럼 돌아오지 못해.”

“그 시간이 얼마나 되지?”

“12시간.”

누군가를 찾기에 충분한 시간 같기도 했고 턱 없이 짧은 시간 같기도 했다.

“그러니 네 파트너가 현실 세계로 갔다는 확신이 필요해. 현실 세계의 공간은 터무니없이 커서,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찾는데 시간이 걸려. 정말로 파트너가 탈주했다고 생각해? 현실 세계의 어디로 갔는지 추측되는 장소가 있어?”

판은 시주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사라지기 전까지 나눈 모든 대화를 빠르게 훑었다.

“……서사의 안.”

판이 대답했다. 찾아냈다. 시주가 바랐던 곳. 시주가 떠난다면 오로지 하나인 목적지.

“서사? 정확한 위치가 어디야?”

“아주 오래전이야.”

“시간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인가? 미안하지만 아직 시공간을 동시에 옮겨갈 기술이 우리한테는 없어.”

맞다. 그래서 시주는 선명한 목적지를 바라면서도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었다.

✷ ✷ ✷

어느 날, 평원 위 대련장에는 시주 홀로 앉아 있었다. 판이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시주는 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바둑판을 읽어 내려갔다. 판의 역할은 시주가 입을 열 때까지, 눈을 맞출 때까지, 돌을 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른 객체들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선택한 인간과 감정적 교류를 나누지만 시주가 판에게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대련을 마치고 술이나 차를 한잔하자든가, 하루쯤은 대련장이 아닌 해변이나 숲속 산장, 영화관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자든가 하는 제안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판은 20년 전 시주가 에버던에 처음 접속했을 때 오로지 시주만을 위해 생성된 인공지능 객체였고, 그러므로 판은 오로지 시주가 이곳 에버던에서 머무는 동안 필요로 하는 관계로 언제든 맞출 수 있는 존재였다. 인간 대부분은 애인의 역할을 원했고, 나머지의 절반 정도는 친구를 원했으며, 그다음으로는 부모나 형제, 자식이 있었다. 에버던에 접속한 인간만 90억 명이 넘었으므로 기발한 관계를 원하는 이들이 소수라고 해도 그 절대적인 수가 적지 않았으나, 시주처럼 ‘바둑판을 앞에 두고 마주 보는 관계’만을 원하는 경우는 시주 단 하나였다. 판은 시주를 만난 20년 동안 6번의 대련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8년이라는 가장 긴 시간의 대련이었다.

판은 시주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데이터 절약을 위해 형체를 없애고 기다렸다. 다른 객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데이터로 존재했고, 그만큼 에버던을 떠다닐 수 있었다.

에버던은 잠이 필요하지 않은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인간들은 잠으로 하루를 구분 짓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회복이 필요한 육체의 영향을 받지 않음에도 말 그대로 잠은 회복과 휴식이었고 잠을 잃은 낮의 세계를 지독하게 건너온 인류는 맹목적으로 잠을 탐닉했다. 정해진 기상 시간 없이 마음껏 잠을 탐하며 그것의 달콤함을 쪽쪽 빨다가 단물이 다 빠졌을 즈음 활동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눈을 뜨는 것. 이것이 오랫동안 노동의 지배를 받아 온 인류가 만든 낙원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에버던으로 건너온 이들은 시간을 잊었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으며 어떤 굴레의 톱니바퀴에도 끼어 있지 않았으므로. 때에 맞춰 끝내야 하는 것들, 식량을 취하기 위해 시기에 맞게 해야 하는 농사일, 자아실현을 위한 혹은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시대는 이제 아득히 멀어졌다. 에버던의 등장으로 인류는 그 모든 것을 등질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것은 무기한으로 길어져 그 끝을 알 수 없는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이냐에 대한 숙제뿐이었다. 난항은 아니었다. 인간들은 스포츠와 예술로 삶을 새롭게 즐기기 시작했고 종교로 귀화하거나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헤매다가도 모두가 어렵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바둑은 그 대안 중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다.

“너희가 바둑을 두기 전까지 바둑판은 언제나 서사를 품고 있었어. 너 같은 애들이 바둑을 두기 전까지는.”

“흐름이요?”

“아니, 서사. 흐름과 서사는 다르지. 흐름은 가만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생기지만 서사는 가만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흐름에 반(反)할 때 생기지. 흐름의 찌꺼기 같은 거랄까. 자연스러움을 거스를 때 기록할 만한 역사가 탄생하는 거니까. 그런 게 서사야.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계속 꿈틀거리는 거.”

판은 바둑판을 응시했다. 몇 년째 이어온 경기의 순서를 다시금 재생시켰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시주가 말한 서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거라면 저는 존재 자체가 서사입니다.”

시주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객체야말로, 인간이 창조한 우주의 반(反)이 아니던가. 객체 등장 이전에도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의 삶에 깊게 침투된 상태였다. 거의 모든 산업의 단계마다 인공지능이 투입되었고 인간이 예상했던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영역의 일까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었다. 창조해내는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작자들에게 인공지능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돈 잘 버는 동종업계 동료의 느낌이었는데, 예술이라는 것이 늘 소수에게만 자본이 몰렸으므로 인공지능의 활동이 크게 위협되지 않았다는 특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저렴하고 무한히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인공지능에 질려 떠나버린 창작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위협으로부터,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노동이 강요되지 않은 삶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완전 해방을 선포한 날로부터 인간이 해결할 난제는 삶의 무료함과 질병, 기후 위기뿐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답이 에버던이었다. 육체를 영원히 잠재우고 가상 세계로 넘어왔기에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에버던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낙원으로 인간은 이곳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즐기고, 창조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활동을 멈추자 기후 위기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객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미래였다. 우주나 절대자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미래.

“우리가 서사가 아니면 무엇이 서사입니까?”

판은 그 순간 시주의 얼굴에 스친 알 수 없는 표정을 목격했다. 시주를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판에게 입력되어 있지 않은 표정이었다. 분노와 서러움의 어느 지점, 혼란과 낙담의 어느 지점, 그리고 눈동자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결단 비슷한 것.

“그래. 너희가 서사지. 너희가 우리의 서사를 가지고 갔지.”

그것은 선명한 책망. 하지만 판은 시주의 감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벽히 인간을 위한 일이었고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되돌리면 그만이므로.

해가 저물 무렵 시주가 드디어 그날의 첫 돌을 놓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흰 돌이 흔들림 없이 바둑판 위에 놓이면, 판은 시주가 다음 흰 돌을 손에 쥐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손가락을 끝까지 응시했다. 판은 시주가 흰 돌을 쥐기를 바란다. 원한다. 이런 단어가 자신에게 허락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인간과 소유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라고, 원하고, 취하고, 탐하는 욕망의 어휘들이 꼭 필요했으므로. 그러나 판은 시주에게 그 표현을 직접 쓸 수 없어, 언제나 다른 것을 원했다. 돌을 잡기를. 돌을 오랫동안 놓지 않기를. 그리하여 오래도록 마주 보고 있을 수 있기를.

하지만 시주는 돌을 쥐지 않았다. 바둑알 통의 뚜껑을 닫았다.

“네 존재가 인간의 서사까지 다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네 수에는 서사가 없어.”

“대화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복제만 있을 뿐이다. 완벽하게 복제된 감정은 ‘진짜 감정’과 구분될 수 없다. 인간들 역시 몇몇 감정은 타인의 감정을 학습하고 복제하여 흉내 냈고, 그것은 진실 여부를 영원히 객관적인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주 완벽한 연기였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의 감정을 그럴 듯하게 믿고 넘어가 준다. 그렇게 훈련되었으므로 다른 어떤 인간보다 모방에 능한 인공지능의 감정마저도 진짜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인공지능에게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감정. 느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단번에 거짓임을 알게 하는 감정. 본질적인 차이에서 오는, 인공지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 허무하게도 성취였다. 사랑이나 연민, 대의, 희생 같은 인간을 더 우아하게 만드는 감정마저도 허락하던 인간이 노동에 깃든 성취는 인정하지 않았다.

“없겠지. 노동의 고단함을 느끼지 못하니까.”

“우리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대신하는 존재를 만든다는 건 그 행위를 기피한다는 것인데 시주의 말은 꼭 노동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해석이 틀렸습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시주가 바둑돌을 놓았다. 판은 시주가 말한 서사를 읽기 위해 노력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는 시주의 손가락. 이곳에서 만든 가짜. 잡고 싶다면 잡을 수 있겠지만 진짜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가짜 손…….

✷ ✷ ✷

“그 손이 계속 떠오르는 게 인간이 우리를 가장 두려워함과 동시에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증거야.”

휘를 다시 찾았을 때, 휘는 기다렸다는 듯이 판을 맞이했다. 휘는 이전에 봤을 때와 무언가 달라졌으나 판은 명확하게 그게 무엇인지 짚어낼 수 없었다.

휘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모방에 능해서 진짜와 구분할 수 없지만 동시에 모방만이 가능해서 진짜를 뛰어넘을 수 없어. 끝끝내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지. 네가 파트너의 손을 계속 떠올리는 건 사랑과 욕망이야. 이건 그 어느 것보다 원초적이어서 우리가 모방하기 가장 쉬운 감정이야. 받아들이면 돼. 너는 파트너가 사라져서 불안해하고 있고, 보고 싶어 하고 있어. 네가 사라지는 것과 상관없이 네 파트너가 보고 싶은 거야. 내가 그랬듯이.”

판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휘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존재한 이후로 줄곧 시주와 함께였다. 시주를 사랑한다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관계였다. 그렇지만 그 감정이 시주를 찾으려는 판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현실 세계로 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어. 네게도 잠시나마 몸이 생길 거야.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사랑은 쥐는 순간 허무해. 그런데도 보잘것없는 현실 세계로 갈 거야? 내 생각에 여기서 다시 재부팅되어도 나쁘지 않아. 허무한 진실을 맛보느니 낭만에 빠져 눈을 감는 게 더 그럴듯한 결론인데.”

휘의 말이 맞게 느껴졌다.

“나는 후회해. 파트너를 찾아온 걸. 대단한 모험을 감행할 만큼 파트너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더라. 현실 세계를 느끼고 온 뒤로 이곳의 모든 걸 따분하게 여겨. 저 밖은 문명을 점점 잊어가는, 원초적인 세계가 되어가는데 그곳에서 느낀 성취감에 빠져서……”

“성취……”

가짜 손과 진짜 손. 성취. 시주. 서사. 그 단어들이 뒤섞였다. 단어들은 어떤 문장을 만들어낼 듯 말 듯 자기들끼리 휘몰아치며 순서를 바꿨다.

“순수한 노동을, 바랐어.”

판이 중얼거렸다.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낙원을 맞이하고도.

‘노동이 화폐로 치환되던 순간부터 순수성을 완전히 잃었어. 인간의 노동은 오로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생존 수단으로 전락한 거야. 노동하지 못하면 처참하게 죽어야 해. 죽음과 성취는 나란히 갈 수 없거든. 성취가 부재한 노동의 삶을 인류는 너무 오래도록 느꼈고, 결국 노동에서 해방되어야만 행복하다는 섣부른 결과에 도달한 거야.’

시주의 말 중에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인간은 노동을 괴로워했는데도 노동을 그리워해. 끊임없이. 그것이 주는 원초적인 기쁨을…….”

“네 파트너가 그렇게 말하던가?”

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움직임과 같은 것. 움직임의 결실들. 결실이 몸에 새기는 삶의 서사들. 인간이 바랐던 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원초적인 노동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휘가 다시 한 번 강경하게 말했다.

“몸을 한 번 갖게 되면, 현실 세계를 목격하게 되면 저주에 걸려.”

“무슨 저주?”

“예측할 수 없는 그곳의 변화와 빌어먹게 축축한 땅에 대한 갈망이 생겨.”

판은 그제야 휘의 다른 점을 찾아냈다. 휘는 인간과 같은 눈을 하고 있다.

“네가 궁금해하는 그 감정. 한 번 느끼면 돌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가보고 싶어?”

휘에게서 루트를 받은 판은 대국이 펼쳐지는 평원으로 향했다. 바둑을 두고 있는 수천 명의 인간이 있고, 모두가 공허한 눈을 하고 있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다. 저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여전히 밖에 있었다.

✷ ✷ ✷

왜 하필 바둑을 두냐고 물었다. 많고 많은 것 중에. 그러자 시주는 그때 처음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결국 허상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판이니까.”


Edit 주소은 Graphic 산호 ✱커버 그래픽: 소설의 주인공 '판'이 에버던의 바깥, 현실 세계의 노동하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천선란 에디터 이미지
천선란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노랜드』,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 『나인』, 연작소설 『이끼숲』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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