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어지기 위해 쓰는 돈과 시간과 마음은 무엇을 남길까?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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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봉이 달라도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 신세를 져야 관계가 이어진다

  •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부자가 되네

  • 연봉이 달라도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벌써 15년째다. 스무 명이 모여서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토론하고 각자 써온 글을 발표하는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의 수업마다 3시간을 꼼짝없이 열중하는데 그건 마치 비워둔 창고를 덥히는 것처럼 ‘공감 에너지’를 풀가동하는 일이라서 수업이 끝나면 허기가 몰려온다. 생맥주 가게에 들러 간단히 뒤풀이를 하기도 한다. 처음 만나서 어디에도 말한 적 없는 수치의 기억을 써내고 읽어준 곡진한 사이, 슬픔의 공동체로 거듭난 이들이 2차로 여흥을 나눈다. 슬픔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중독성 있는 감정인지 느끼고 나면 놓아주기 싫은 법이다.

    열 명쯤 모여서 두세 시간 이어지는 뒤풀이에서는 대략 15만 원 정도 비용이 나온다. 반장을 맡은 학인이 일괄 계산하고 나중에 영수증 이미지를 첨부하여 공지를 올린다. ‘치킨 가라아게 20,000원(2개)+두부김치 2만 원(2개)+먹태 1만 8천 원=98,000원이고요. 인원수 10으로 나누면 9,800원입니다. 각자 마신 음료값에 9,800원씩 더해서 아래 계좌로 입금해주세요.’ 저 공지를 처음 봤을 때 무릎을 쳤다. ‘와, 천잰데? 요즘 젊은이들은 역시 현명하구나’라며 감탄했다. 인원수대로 ‘칼같이’ 나누면 마음 쓰이는 얼굴들이 있곤 했다. 그래봤자 뭐 만 원 선에서 더 내거나 덜 내는 걸 테지만.

    고물가 시대에 하찮은 액수로 보이기도 하나 용돈 없는 청년이거나 구직 중이거나 여러 사정으로 긴축 재정 중이거나 등 나이와 잔고와 관계의 역동에 따라 만 원의 무게는 다르므로,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러한 ‘돈과 관계’의 고차함수를 풀 능력이 없어서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내가 계산해버리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강사니까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낼 때 느껴지는 힘, 감정, 우월감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관행에 제동이 걸린 건 어느 학인의 문제 제기였다. 글쓰기 동료로서 동등한 관계를 위해 각자 분담하자고 제안했다. 곰곰이 따져보니 일리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고들 하는데 나이와 경제력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현명한 처세술인줄 알았던 명제가 돈 없는 중장년층을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시키는 무정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돈으로 권한이 주어지고 위계가 설정되는 방식은 너무 자본주의적인 관계 맺음이 아닌가.

    한번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중년 학인이 모두에게 밥을 사고 싶다고 했지만,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한 적도 있다. 동료가 상사로 보여선 곤란했다. 하지만 ‘밥 사고 싶은 마음의 출구’는 열어놓았다. 한턱  낼 비용을 아끼거나 과제를 안 한 벌금 등을 모아서 시민단체에 후원을 하는 방식으로. 아무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뒤풀이 비용은 참석자 n분의 1이 되었다가 가끔 나누기도 애매한 피자 한 판쯤은 내가 쏘기도 하면서 다시 안주만 n분의1 분담 원칙으로 진화해나갔다.

    중국의 사상가 이탁오는 말했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과연 그랬다.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섰지만 다양한 이들과 어울리며 귀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관계에서는 기계적인 공평함이 아니라 상황적인 섬세함이 요구된다는 것, 가장 취약한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연봉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서로의 차이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다르게 물어야 한다. ‘연봉/나이/학벌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요즘은  AI에 글쓰기를 맡기는 건 물론이고 AI와 심리상담을 3시간 했다든가 카톡을 보여주고 연애상담을 받았다는 경험담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언제나 거기 있는 존재, 거절당할 두려움이 없어서 상처받을 위험도 없고 돈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친구, AI와의 안전한 관계에 젖어 드는 분위기다. 어떻게든 당장 내게 시급한 도움과 위안을 찾아 나서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사람과의 연결이 약해지면 ‘너무 아까운 것’을 놓치게 된다.

    이를테면 수영장과 바다를 경험하는 차이라고 할까. AI가 써주는 매끄러운 글은 내 사유의 근육을 조금도 키워주지 않는다. 자기 느낌과 생각에 꼭 맞는 표현과 문장을 찾으려고 낑낑대는 동안 쓰기 전에 몰랐던 깨달음을 얻고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자기 언어가 만들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파도 같은 감정들, 매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우연들은 ‘타인의 바다’에 뛰어드는 삶에서만 얻어지는 원초적 즐거움이다. 대면이라는 위험한 놀이에 자신을 빠뜨리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므로 종국엔 고립이라는 상처를 스스로 입히게 될지도 모른다. ‘세 줄 요약’으로 세상만사를 파악하는 시대에 맞서 일단 같이 만나서 두꺼운 책을 읽고 긴 글을 쓰는 일을 오래 지속하는 이유다.

    신세를 져야 관계가 이어진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동료의 얼굴이 계속 바뀐다. 나의 스승이자 친구인 학인들, 단행본 출간 작업을 같이하는 편집자는 그래도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낸다. 반면에 학교나 도서관에서 강연을 하느라 일정을 조율하는 사서, 교사 등은 일회성 관계에 그친다. 실수를 해도 만회할 기회가 없으니까 최대한 말을 아끼고 예의를 다하느라 가까워지기 어려운데, 한번은 사서 샘과 한나절 짜리 풋풋한 우정을 나눴다.

    강연 전날 메일이 왔다. KTX역에서 도서관까지 픽업을 원하면 나갈 테니 편히 말해달라고 한다. 이럴 때 천년의 고민에 휩싸인다. 입 다물고 있어도 되는 택시를 탈 것인가(강연할 에너지를 비축하자), 사회적 자아를 내세워 어색한 대화를 나눌 것인가(강연 전에 진이 빠지면 어쩌지). 지도어플을 켜고 검색하니 25분 소요에 택시비가 34,000원. 지역의 경우 배차 간격이 넓고 빙빙 도는 버스는 선택지에 없다. 왕복 교통비 7만 원이라니, 침묵을 사는 대가 치고는 너무 비쌌다. 망설이다가 답장을 썼다.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차역 주차장에서 접선하고 드디어 탑승.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앉아 차 문을 닫고 5초쯤 지났을까, 나도 모르게 첫마디를 뱉었다. “어머, 넬이네요?” 의자에선 ‘엉뜨’ 열선이 온기를 뿜어대고 스피커에선 모던락 밴드 넬의 ‘현실의 현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간 넬의 공연을 다녀오면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는데 아무래도 사서샘이 그걸 보고 준비한 모양이다. 몸의 세포들이 노곤해지며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넬은 이름만 알았지 음악은 오면서 처음 들었는데 좋더라고요.” 다정한 사서샘이 만산홍엽으로 물든 가을 풍경을 가르며 말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주인공 제시와 셀린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충동적으로 비엔나에서 같이 내리는 것처럼, 우리는 나란히 도서관 옆 분식점에 왔다. 나는 혼밥으로 강연을 준비하려던 계획을 틀어서 사서 샘에게 “점심 드셔야 되면 같이 드실래요?”라고 말을 걸었다. 키오스크 앞에서 살 안 찌는 키토김밥 두 줄과 메밀국수 하나를 나눠 먹는 것으로 메뉴를 합의하고 결제 단계로 넘긴 다음, 식당 입구에 들어오면서부터 신용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사서샘을 어깨로 막아서며 “택시비를 아꼈으니 내가 사겠다”고 우겨서 밥값 20,500원을 계산했다.

    나는 삼십 대에 자유기고가로 일하며 인터뷰를 주로 했다. 취재원과 카페에서 만나 음료를 시킬 때 인터뷰이가 계산한 적이 있었다. 내가 “취재비가 나온다”며 만류해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사겠다”며 극구 돈을 냈다. 그런 경험이 두 번 있었고, 두 명 다 나이 든 여성 배우였다. 그때마다 속으로 ‘언니 멋지다’며 감동했다. 나도 인터뷰어 경력이 쌓이고 어딜 가면 대접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분들이 가끔 떠올랐다. 언니들이 내게 남긴 교훈은 나이 들어 지갑을 열자가 아니라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에 가깝다. 어느새 받은 것을 젊은 동료에게 되돌려줘야 하는 언니 자리에 내가 있다.

    밥 대신 계란 지단을 채썰어 넣은 탓에 목이 메고 하나 넣으면 볼이 미어져서 얼굴이 못생겨지는 키토김밥을 우적우적 먹으며 사서샘과 나는 수다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커지지 않고 끊기지도 않는 내향인들의 잔잔한 대화. 사서샘은 잔나비 팬이었고 락페스티벌이 힘들까봐 안 가봤는데 가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락페는 무대를 보다가 돗자리존에서 쉴 수도 있어서 하나도 안 힘들다며 락페 즐기기 팁을 전수했다. 커피는 제가 사겠다는 사서샘을 따라 로스터리 카페로 이동해 커피 테이크아웃까지 야무지게 완료했다. 어쩐지 들뜬 마음으로 평소보다 신나게 강연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황금빛 낙엽이 바람을 타고 화르륵 화르륵 황홀하게 날렸다.

    “내년 펜타 락페스티벌에 넬이랑 잔나비랑 같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저 잔나비 안 나와도 내년엔 꼭 가볼래요.” “저도 올해 못 가서 내년엔 갈 거예요. 락페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약 70,000원어치 ‘침묵’을 사는 대신 택한 ‘낯선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과 자녀의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을 쏟아내는 분들도 있다. 성심껏 답해드릴수록 질문 공세가 이어지면 ‘저는 글쓰기 자판기가 아닙니다’라며 속말을 삼킨다. 대단한 악의가 없이 한 사람을 고정된 대상으로 보는 ‘도구적 관계’에 우린 생각보다 익숙하다. 정보는 넘쳐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해오는 경험과 지혜의 회로가 끊겨버려서 타인의 기분을 읽어내는 능력이 감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책 얘기만큼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음악 얘기를 원 없이 나눴더니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내릴 때 손에 쥐여준 선물을 열차에서 펴보고 또 감동했다. 사서샘들이 직접 만든 것으로, 나의 책 열세 권을 초콜릿 미니어처북 모양으로 일일이 만든 수공예품이 가지런히 상자에 담겨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과 선물 같은 시간이 마냥 꿈 같았다. 사서샘에게 감사하고 나에게도 칭찬했다. 신세 지길 참 잘했어! 신세를 져야 관계가 이어진다. 사람을 만날 때 부과되는 정서 노동을 귀찮아도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일을 해치우듯이 하기보다 정성을 쌓자고 다짐했다. 〈비포 선라이즈〉 주인공들의 약속처럼 과연 내년 락페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의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부자가 되네

    “가을 하면 어떤 색이 떠올라? 붉은색, 노란색? 아니면 주황?” 서울시 한강에 자리한 섬 선유도공원을 한가로이 거닐다가 친구가 물었다. 전날 남산에 갔다가 지인들과 가을과 색 이야기로 담소를 나눴다며 내게도 의견을 물었다. “글쎄, 음, 붉은색?”이라고 말하고 둘러보니 선유도공원은 붉음이 적다. 여름이 아직 거두어가지 않은 초록에 황금색, 단감색, 살구색, 갈색까지 낮은 채도의 나뭇잎들이 한들한들 시야를 채웠다. 고궁처럼 나무가 크고 화려하지 않고 위로 솟은 건축물도 없다. 절처럼 고즈넉하다.

    선유도공원은 봄가을에 연례행사처럼 온다. 거주지가 서울 서북부 쪽이라서 위치적으로도 가까우니 부담이 적다. 버스요금 1,450원만 내면 도착하는 비밀의 정원, 도시의 속도와 일의 피로감에서 해방시켜주는 나만의 힐링 스팟이다. 이곳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비로소 가을에 속한 기분이 든다. 혼자 갈까 하다가 백수의 첫 가을을 맞는 친구가 떠올라서 문자를 넣었다. 약속을 잡으며 ‘선유도공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거기서 11시에 보자고 했더니 거기 안다며 이런 문자가 왔다. “지나갈 때마다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정류장이야.”

    공원의 가장자리, 한강 뷰 편의점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저쪽에서 혼자 사발면을 먹는 사내를 제외하곤 우리뿐이다. 평일 오전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친구는 한강라면을 먹자고 했다. 봉지라면을 기호대로 고른 후 4,500원을 계산하면 일회용 대접 같은 그릇을 같이 준다. 그걸 라면 제조기에 올려두고 뜨거운 물을 부어 3분 조리하면 완성. 내 생애 첫 한강라면을 선유도에서 개시했다. 분식점 라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하늘 맛, 바람 맛이 스프처럼 가미된 별미다. 운 좋으면 낙엽이 고명처럼 얹혀진다. 나는 동네맛집에서 사 온 4,000원짜리 야채김밥 두 줄을 펼쳐놓았다. 친구가 장바구니에서 합정역 지하도에서 포장해 온 떡볶이를 한 팩 꺼낸다. 소풍에 떡볶이 빠지면 서운하니까 샀다고.

    이름하여 선유도공원 정식이 차려졌다. 김밥, 라면, 떡볶이, 그리고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 사과까지 놓으니 둥그런 테이블이 비좁다. 현재기온 15도. 가만히 앉아서 김밥 한 알 먹고 하늘 보고 라면 한 젓가락 후루룩 넘기고 강물 한 번 보고 떡볶이 한 입 베어물고 친구를 본다. 바다를 본 시인이 ‘바다는 넓다’를 읊조리듯이 ‘참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으로는 파란 하늘을 길게 가르는 새 떼를 좇으며 나는 말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부자가 된 거 같다.” “그러네. 부자네.” “부자는 가처분 시간이 많잖아. 일을 안 해도 생활비가 있고 힘든 노동을 최대한 외주를 줄 수 있으니까.” “근데 난 근처에서 회사를 10년이나 다녔으면서 여기 올 생각을 왜 한 번도 못 했을까...”

    직장은 돈을 주는 대신 시간을 압수한다. 시간만 가져가면 좋은데 마음도 도려내어 가져간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누구라도 다정함을 잃지 않을 재간이 없다. 다정함이 사라지면 자동으로 관계도 틀어진다.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전부다.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니까 단풍놀이도 다니고 좋다면서도 앞으로 먹고사는 불안이 떨쳐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고 시간이 없으면 불행한 삶의 딜레마.

    인간사 대부분은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약이다. 불안을 없애려 하지 말고 다른 정서로 잠시라도 불안을 잠시 낙오시키는 거다. 선유도공원의 가을이 주는 설렘 같은 강한 맛으로 불안 물리치기. 마음이 괜찮아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놀다 보면 괜찮아지기도 하는 거다. 돈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는 것을 두고 금융 치료라고 하던데, 우리는 ‘가을 치료’를 제대로 받았다. 20,000원도 채 안 되는 돈으로 배부르게 행복했으니까. “다음주만 해도 추워서 야외에서 한강라면 못 먹었을 거야.” 으쓱하며 날씨 어플을 켜니 다음주 기온은 5도까지 내려간다. 오늘 오길 잘했다. 같이 오길 잘했다.

    일전에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그에게 선생님이 보시니 어떤 노년이 행복하던가요? 하고 물었다. 그는 세 가지를 꼽았다. 요양원에 올 최소한의 돈, 추억, 그리고 관계. “내 옆 침대 어르신과 친구로 지내냐 적으로 지내냐. 여기도 관계예요.” 요양원은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폭 넓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요양보호사, 자원봉사자, 프로그램 활동하는 분들, 예배드리는 분들, 청소하는 분들… 그들과 관계를 잘 맺는 어르신이 행복하다는 거다.

    그러면서 옆 침대에 자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랑,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눈치 없는 어르신이 문제가 된다고 귀띔했다. 돈과 추억이 많아도 관계가 틀어지면 외롭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도 똑같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내 삶을 단단히 다져줄 관계를 위해서는 돈보다 눈치를,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섬세함이 필수임을 잊지 않기로 한다. 관계는 생의 마지막까지 주어지는 숙제고, 존재의 피난처는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이다.


    Edit 이지영 Graphic 조수희

    은유 에디터 이미지
    은유

    작가, 인터뷰어. 인문공동체에서 글쓰기수업 ‘메타포라’와 ‘감응의 글쓰기’ 등을 2011년부터 꾸려오고 있으며 성폭력피해생존자와 글쓰기 치유워크샵도 진행한다. 〈시사IN〉에 인터뷰 기사를 연재 중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잊지만 없는 아이들》, 《아무튼, 인터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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