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 다정한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
번역은 말하는 행위라기보다 듣는 행위에 가깝다. 스크린 속 인물이 삼키는 한숨, 뱉지 못하는 망설임, 찰나의 침묵에 담긴 감정의 결까지 남김없이 듣고 그 속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아 길어 올리는 것. 그게 나의 일이다. 작품마다 한 문장을 위해 수십 개의 단어를 저울질하고 대사에 담긴 뉘앙스의 냄새를 추적한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며칠씩 머릴 쥐어뜯더라도 벌써 20년째 번역을 하는 내겐 고행이라기보단 일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작품을 거치며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번역하는 훈련을 해 오고도 정작 가장 서툰 번역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밤샘 작업 후 찾아온 무력감을 ‘한심한 나태’로, 작은 실수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번역해 버리는 내 안의 번역가는 세상 누구보다 냉정하고 가차 없다.
마흔 중반을 넘어서며 실감하는 것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비판자가 더 집요하고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비난은 잠시 스쳐 가지만 내 안의 목소리는 24시간 내내 나를 따라다니며 평가하고 질책한다. 그는 잠든 나를 깨워 지나간 실수를 흑백 영화처럼 반복 상영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실패를 다큐멘터리처럼 생중계한다. 마치 내 안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검사라도 되는 듯이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기소 대상으로 삼는다. 이토록 가혹한 내부 검열관을 둔 채 나는 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다정해질 수 있을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썼던 에너지를 온전히 나에게 돌려보는 것,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자기 자신’은 가장 번역하기 까다로운 텍스트다. 온갖 편견과 감정이 필터로 작용해 원문을 깨끗한 상태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정해지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세상이 결함 찾기와 채찍질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거대한 시스템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약한 소리가 패배자의 넋두리로 치부되고 과정보다 결과로 모든 것이 평가받는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 내 안의 비판자는 바로 그 시스템이 내면화된 유능한 감독관이다. 그는 ‘이만하면 됐어’라는 안도감을 사치로 여기고 ‘아직 멀었어’라는 채찍질을 성장의 동의어로 삼는다. 실제로 그의 혹독함은 종종 가시적인 성과를 낳기에 우리는 그를 떼어내야 할 악덕이 아니라 필요한 동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는 효율이라는 잣대로 감정적 군더더기를 잘라내면서 목표 달성을 위해서 감정은 불필요한 비용이라고 외친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 대신 그것을 분석하고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부채로 쌓여간다. 효율만이 삶의 유일한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기계가 아닌 이상 인간은 감정이라는 윤활유 없이 온전히 굴러갈 수 없다. 그러니 언제까지 이 냉혹한 감독관에게 내 삶의 편집권을 모두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안의 비판자는 사실 형편없는 번역가다. 그는 늘 최악의 단어만을 선택해 상황을 극적으로 왜곡한다. 가령, 마감에 쫓겨 쓴 문장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는 ‘이 문장은 다음번에 더 잘 다듬어보자’라고 번역하는 대신 ‘거봐, 넌 재능이 없어’라고 매몰차게 힐난한다. 작은 실수 하나를 내 전체의 결함으로 확대 해석하는 치명적인 오역을 상습적으로 저지른다. 타인에게 받은 칭찬마저도 ‘상대가 예의상 한 말’이라거나 ‘네 어설픈 실력을 제대로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왜곡해 번역한다. 또한 새로운 제안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넌 해낼 능력이 없다’는 확신으로 둔갑시키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의 안도감마저 ‘곧 닥쳐올 위기의 전조’라고 번역해 버린다. 그리고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는 몸의 신호마저 ‘의지박약의 증거’로 번역한다. 이런 편향된 번역에 길들여진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늘 부족하고 문제 많은 존재로 인식하고 만다. 마치 왜곡된 자막으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늘 고민이다. 이 악순환을 끊고 나를 위한 정역을 시작할 순 없을까. 번역가로 오래 살아온 나는 사실 방법을 알고 있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언어 습관이면 첫걸음은 뗄 수 있다. 내 안의 비판자가 뱉는 1차 번역을 의심하고 곧바로 2차 번역을 시도하는 거다. 예를 들어,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 틀어졌을 때 ‘역시 난 안 돼’라는 1차 번역문이 올라오면 의식적으로 ‘괜찮은 시도였어’라고 번역문을 고친다. 감정의 근력 운동과 비슷하다. 수십 년간 한쪽으로만 발달한 비판의 근육 대신 너그러움과 수용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 물론 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다. 평생 써보지 않은 근육을 움직이려는 것처럼 삐걱대고 자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이 오글거려 닭살이 돋는다. 매번 어색하고 민망하다. 하지만 가혹한 비판자가 사는 내 안의 살풍경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 민망한 시도를 의식적으로 반복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이 고된 훈련이 결국 가져다주리라 믿는 선물은 지속 가능한 삶이다. 끊임없는 자기 비난은 영혼을 서서히 좀먹는다.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내면의 칭찬에 인색하니 기쁨은 짧고 자책은 길다. 이런 상태로는 오래 달릴 수가 없다. 새로운 도전을 앞둔 사람에게 자기 비난은 족쇄와 같다. ‘해봤자 안 될 거야’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시작하려는 용기를 꺾고, 완벽한 결과에 대한 강박은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결국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무력한 상태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자기 비난의 과잉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때가 많다. 어쩌면 나에 대한 다정함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심지어 가족도 나를 지지하지 않을 땐 나라도 나를 다독여야 최소한의 동력을 얻는다. 나는 내 최후의 보루다. 영어 ‘last resort’는 최후의 보루, 최후의 수단을 뜻한다. 여기서 ‘resort’는 ‘방책’이 아니라 ‘의지할 곳’, ‘쉴 곳’을 뜻한다. 내 최후의 보루가 나라고 한다면 이 영어 표현처럼 내 최후의 안식처이자 내 최후의 쉴 곳은 바로 나다. 세상 그 누가 날 지지하지 않아도 나만은 나를 다독이고 위로해야 한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나를 향해 다정해지려는 이 서툰 시도가 혹시 타인을 향한 시선까지 바꿔놓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내가, 타인의 작은 허점에도 그토록 날을 세웠던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타인을 향한 날 선 비판은 사실 내 안의 비판자에게 ‘난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항변하기 위한 서글픈 자기방어였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현자가 말했듯이 역시 자신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시작점이다.
나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타인의 말을 번역하고, 동시에 내면의 말을 번역한다. 그리고 아직은 입에 잘 붙지 않는, 나를 향한 다정한 문장들을 가끔 의식적으로 소리 내어 되뇐다.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섬세함의 절반만이라도 나를 향한 문장에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번역은 이런 문장들을, 나를 향한 다정함을 마음속에 온전히 새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dit 주소은 Graphic 김목요 ✱커버 그래픽: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나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인물을 통해 ‘스스로에게 다정함’이라는 주제를 담아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