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재테크를 했을까?

심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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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이재운(1721~1782)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생원시에는 합격했지만 관운도 없었고, 크게 성공한 삶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관심이 있었으니, 바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상업이 빠르게 성장하던 조선 후기, 이재운은 시대를 관찰하며 변화 속에서 부를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게 조선 유일의 재테크 서적인 《해동화식전(海東貨殖傳)》이 탄생했다. 《해동화식전》에는 전국에서 이름난 부자 아홉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늘날로 치면 성공한 투자자와 사업가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재산을 불려 나갔을까. 300년 전 조선의 재테크 서적에서 오늘날 우리가 건져낼 조언은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는 늘 새로운 부자를 만든다

조선 후기에 부자가 된 이진욱은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어 어렵게 살았다. 그를 안타깝게 여긴 숙부가 방 한 칸을 내어주었고 먹고사는 것을 책임져 주었다. 진욱은 숙부의 보호 아래 열심히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성품이 순수하고 행동이 근실’한 진욱을 유독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는데, 이웃집 노인이었다. 어느 날 노인은 진욱을 불러 은 1,000냥을 내밀었다.

“은 1,000냥일세. 적은 돈은 아니니 한번 돈을 불려보시게.”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평생 놀고먹을 만큼의 돈도 아니었다. 골똘히 고민하던 진욱은 부산 동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왜관이 있었다. 진욱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한 왜인 머슴을 주목했다. 가난하지만 성실했고, 무엇보다 신의를 지킬 사람처럼 보였다. 진욱은 그가 마음에 들었고, 돈을 주면서 동업을 제안했다.

왜인 머슴은 진욱의 밑천을 들고 일본으로 넘어가 장사를 했다. 아마도 진욱은 돈을 벌기에 상업이 발달한 일본이 좋다고 판단했고, 왜인 머슴이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얼마 뒤 왜인 머슴은 300냥 정도의 이익을 남겨 진욱에게 가져다주었다. 진욱은 이 돈으로 결혼을 하고 집도 샀다. 그리고 2년 뒤, 사업 파트너인 두 사람에게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통신사는 대규모의 국제 사절단이었고 한일 친선을 위한 중요한 외교 의례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분명 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할 때 빈손으로 갈 일은 없을 터. 진욱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 2년간 진욱도 왜인도 열심히 노력해서 1,000냥을 수만 냥으로 불려둔 상태였고, 이제 두 사람은 과감한 투자로 승부를 걸었다. 그는 왜인과 함께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인삼을 사들였다. 당시 조선 인삼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상품작물로 일본, 중국 등 외국인들이 최고로 치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그대는 나라 안의 인삼을 전부 거둬줄 수 있겠소?” 왜인은 가지고 있던 원금과 이문을 모두 진욱에게 넘겼다. 3년 동안 불어난 은은 이미 수만 냥에 이르렀다. 진욱은 그 돈을 들고 관서와 관북을 돌아다니며 인삼을 모조리 사들였다. 시장에서 인삼이 자취를 감추자 값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 이재운, 《해동화식전》, 휴머니스트

통신사에 필요한 인삼 물량을 구하지 못한 조정은 결국 비싼 값을 치르고 진욱의 인삼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난했던 청년 진욱은 조선 후기의 거상이 되었다.

이진욱의 성공은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지만 은행이나 주식거래소 등 경제 환경에 걸맞은 제도적 성숙이 없었기 때문에 매점매석이 가능하고, 잘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시대였다. 진욱과 왜인은 어떤 상품이 큰돈이 되는지, 어떤 때에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는지에 대해 수년간의 경험으로 노하우를 터득했던 것이다. 진욱은 국내 시장을, 왜인은 일본 시장의 현황을 파악하며 중요한 정보를 교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삼 사업의 최적기를 파악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더불어 애초에 노인이 진욱에게 그냥 엽전이 아닌 은을 준 것 또한 당시 국제 무역의 화폐가 은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범한 선택은 아니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진욱이 성공 이후에도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어려운 친척과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생활비를 보태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주었으며, 부조와 부의금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숙부에게 받았던 도움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조선의 양반들도 끊임없이 재테크를 해야 했다

조선 시대의 경제구조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토지가 많을수록 유리했고,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도 중요했다. 땅이 많으면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었고, 무상 노동력인 노비를 동원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양반들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상속’이었다. 조선은 흔히 장자상속 사회로 알려졌지만 실제 법은 달랐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은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삼았다. 즉, 부모의 재산을 자식들이 고르게 나누어 가져가는 구조였다. 여성들도 균분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산이 쪼개지기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보다 작은 재산으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큰 부자라도 새로운 부를 만들지 못하면 후손들은 점점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양반 가문들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찾아야 했다.

재령 이씨 가문은 경상도 영해*를 근거지로 성장한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다. 조선 전기 이맹현(1436~1487)은 문과에 급제하고 명문가인 파평 윤씨와 혼인해 세조, 성종 때 높은 관직에 올랐다. 물론 관직에 오른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을 세운 관료는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혼인을 통해 처가나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 재령 이씨 가문은 광대한 토지와 노비 750명을 소유한 대가문으로 성장했다. 자산은 상속을 거치며 조금씩 분할되었고, 후대에 이맹현 같은 인물이 계속 등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기 자산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후손들은 적당히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

반면 해남 윤씨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해남 윤씨는 유명한 문인 윤선도를 배출한 가문으로, 17세기에 크게 성장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해남 지역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지금의 전남 해남군 화산면, 현산면 일대였다. 근거지인 해남읍은 내륙이지만, 현산면은 진도를 마주한 바닷가였다. 단순히 땅을 사는 것이 아닌, 바다로 진출해 간척 사업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현산면은 남해의 해안가인데 지형상 간척할 만한 땅이 많았다.

제방을 쌓고 바닷물을 막으면 새로운 경작지가 생겨났다. 당시 조선 정부 역시 간척 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경작지가 늘어나면 농업생산력이 올라가고 그만큼 세수를 확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해남 윤씨 집안이 명문가였기 때문에 지역 수령이 농민들을 동원해서 제방 작업에 도움을 주는 등 여러 혜택을 누리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노동력을 늘려 성공한 가문도 있었다. 광산 김씨 예안파는 대를 이어 노비 수를 늘리는 데 성공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광산 김씨 예안파의 상속 노비는 1550년 190명이었는데, 9년 뒤에는 223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몇 년 사이 33명이 늘어난 것이다. 이는 적극적인 양천교혼, 즉 소유 노비를 일반 양인과 결혼시켜서 얻은 결과였다.

조선은 노비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노비가 늘어날수록 양인이 줄고 그만큼 세금도 줄었지만 조선 건국 초기 확실한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고, 이후 노비를 소유한 양반 관료들에 의해 개혁이 되지 못했다. 광산 김씨 예안파를 비롯하여 노비로 노동력을 늘린 가문들은 바로 이러한 지점, 정부의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 혹은 정부가 손 놓았던 지점을 적극 파고들어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300년 된 재테크 서적에서 건져 올린 조언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결국 좋은 집안과 재산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실제로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토지와 노비라는 단순한 사업 수단, 그리고 과거 급제를 통한 출세의 문 역시 매우 좁았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삶은 버거웠다. 밑천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안전망도 거의 없었다.

《해동화식전》을 쓴 이재운 역시 같은 고민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진중하게 조언한다. ‘본디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지고자 한다면 힘들여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고생 끝에 부를 얻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이재운은 운명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곤경과 불운에 처하여 격분하는 것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요. 무에서 유를 찾아내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계획을 세워 결단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은 용기가 있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이며, 남과 함께 일하되 속이지 않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 이재운, 《해동화식전》, 휴머니스트

오늘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조선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회가 존재하는 시대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새로운 산업이 끊임없이 등장하며, 누구나 소자본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다. 저출산과 양극화, 치열한 입시 경쟁과 자산 격차는 우리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기회는 많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성공과 출세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역시 조선 후기처럼 거대한 변화의 시대인지 모른다. 조선 전기에는 사회가 안정적이었지만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길,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해지고, 경제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면 여러 틈이 생기고 그 기회를 포착한 이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오히려 혼란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혈통과 문벌 외에는 개인을 보호해 줄 장치가 거의 없었던 조선과 달리, 지금은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를 통한 사회적 기반 또한 존재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회의 시대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읽는 감각, 기회를 붙잡는 용기와 결단력,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리고 사람의 신뢰를 잃지 않는 태도들. 오래된 서적 속 조언은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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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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