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디자이너라는 병목
“한 달 정도는 디자인을 안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어요” 토스 비주얼 디자이너 고현선이 이 말을 꺼냈을때 기술이 위협하는 건 ‘일’이 아니라 ‘의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묵언의 압력. 기술로 향하던 의심의 화살표는 U턴으로 돌아와 사람에게 향한다. 사람은 느리고 의심하고 잘 잊고 자주 헤매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병목은 아닐까.
고현선은 2020년 토스의 첫 번째 그래픽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토스의 심미성이 듬뿍 담긴 이모지 폰트 ‘토스페이스(Tossface)’부터 AI 그래픽 생성기 ‘토스트(Tosst)’까지, 토스하면 떠오르는 시각적 인상의 많은 영역에 그의 터치가 닿아있다. 그는 AI를 누구보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마지막 손질을 놓지 않는다. AI가 함부로 달려 나가려는 길목 중간에서 그는 AI를 자주 멈춰세우고 세심히 살핀다. 병목의 자리에서 고현선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미지와의 조우
김창선 (토스 Content Producer, 이하 창선): 비주얼 디자이너로서 최근 1년 사이에 변곡점이라고 할만한 사건은 뭐였나요?
고현선 (토스 Visual Designer, 이하 현선): 음… 저는 최근 1년이 변곡점의 시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창선: 의외네요. 저는 지난 한 해가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임팩트 있는 시기였을거라 짐작했어요. 구글의 ‘나노 바나나’나 엔트로픽의 ‘클로드 디자인’ 같은 강력한 AI 디자인 툴이 등장했잖아요.
현선: 지난 1년이 AI 디자인의 완성도 측면에서 정말 폭발적인 성장의 시기였던 건 맞아요. 하지만 비주얼 디자이너인 저에게 진짜 변곡점은 AI 이미지 생성기 미드저니(Midjourney)와 달리(Dall-e)가 막 출시했던 2022년이었어요. 막연하게 떠오르는 생각과 언어만 던져주면 AI가 어떻게든 이미지를 생성해낸다는 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죠.
예를 들어 ‘애플에서 지폐를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거 정말 궁금하지만 직접 구상하고 그리려면 한참 걸리잖아요. 일단 미드저니에게 자연어로 입력을 해본 거죠. 퀄리티는 한참 떨어지지만 애플이 가지고 있는 조형성과 미감을 어떻게든 차용해서 지폐를 만들려고 하는 그 시도가 되게 ‘인간적’이라고 느꼈어요. 잘 못하더라도 시도하고 만들어내는 노력이 보이더라고요. AI에게서 그런 인간적인 의욕을 발견하다보니 오히려 제가 의욕이 사라졌었죠. 불현듯 ‘일을 안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한 달 정도 지속됐어요.
창선 놀라웠던 건 결과물의 퀄리티가 아니라, 내가 던진 추상적인 발상과 언어를 AI가 끝까지 시각화하려고 애쓴다는 점이었네요?
현선 : 맞아요. 손가락이 6개든 팔이 꼬여있든 이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는 디자인이 많이 펼쳐보고, 융합하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걸 창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AI가 디테일이 떨어지더라도 많은 시각적 아이디어들을 다양하게 펼치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 점이 놀라웠던 거죠.

일하기 싫어하는 천재와 일하는 법
창선: 이제는 AI를 디자인 작업의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계실 것 같은데, 실제 어떻게 사용하세요?
현선: 작업에 따라 여러 AI 서비스를 넘나들며 쓰고 있어요. 일단 이미지를 만들기 전 언어화 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LLM을 사용해요. 어떤 생각이나 컨셉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면 정제되고 정확한 언어로 정리해주죠. 그 다음에 이미지 결과물을 생성하는 과정에서는 LLM 툴 안에 속한 이미지 생성기를 쓰고 있어요. 특히 이 분야에서 여러 파운데이션 모델들이 계속 엎치락 뒤치락 경쟁하고 있어서 그때마다 가장 좋은 성능의 모델을 사용해요. 마지막으로 모션을 입히는 영상화 과정에선 비디오 생성 전문 모델을 사용하죠. 이제는 AI가 없으면 안될 만큼 제 워크플로우 안에 많이 녹아든 상황인데 물론 중간중간 개입해서 직접 손보고 튜닝하는 과정은 있지만 제가 A to Z로 키 잡고 새로 룩 그려서 끝까지 작업하는 일은 정말 많이 줄어들었어요.
창선: 그렇게 AI가 뽑아낸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면 어때요? 위화감이나 뭔가 ‘쎄한 느낌’이 들 때는 없으세요?
현선 : AI가 뽑아낸 모든 산출물에서 그 쎄한 느낌이 다 있어요. 클로드에게 이 AI스러움이 뭔지 물어보니까 그걸 “지문”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정확히 어떤 점이라고 짚을 수는 없지만 인간이 직감적으로 느끼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는 거죠.
그래서 AI로 어떤 산출물을 만들더라도 저는 그걸 최종 산출물로 쓰지 못해요. 중간 중간 계속 손보고 튜닝하고, 마지막 마감은 결국 직접 해요. 위화감이 느껴지는 AI의 지문을 지우고 사람이 봤을 때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건 여전히 제 역할이죠.
창선: 보통 AI를 잘쓰는 방식이라고 하면 끝내주는 스킬을 학습시키고, 완벽한 프롬프트를 넣어서 ‘딸깍’ 한번으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작업 방식은 다르네요.
현선: 제가 쓴 프롬프트가 완벽하고 콘셉트도 정확해서 한번의 명령으로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내면 물론 좋겠죠. 그런데 그래픽 디자인은 그렇게 작동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일할 때도 그렇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최단 거리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구상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피드백 받으면서 여러 경로를 탐색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죠.
그런데 AI는 디자이너의 개입이 없으면 적당히 무난한 방향으로 최대한 빨리 가고 싶어 해요. 그건 목표에 효율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거지, 가장 이상적인 목적을 향해가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불쾌감을 느끼는 포인트가 바로 그 부분이에요. AI가 혼자 앞서가지 않도록 사람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표까지 가는 최단 거리가 아니라 가장 높은 목적을 계속 지향하도록 개입하는게 인간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디터 람스 같은 디자인 대가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디자인과 노하우, 작업 노트를 전부 학습시킨 AI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볼게요. 그러면 ‘디터 람스 AI’가 새로운 과제를 두고 디터 람스가 만들 결과물과 가장 흡사한 디자인을 내놓을 거라고 예상하잖아요. 근데 저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감히 추측해보자면 디터 람스는 자기가 해왔던 과거의 레거시만 가지고 ‘여기서 출발해서 여기서 끝내는게 가장 빠르다’ 라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거거든요. 새로운 과제 앞에서 고민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본인도 아직 가본 적 없는 길로 조금 더 나아 갔을 거예요. 그게 인간 디자이너가 매번 개척하는 영역이고 거기엔 데이터화 할 수 없는 디터 람스의 직관과 경험, 감정과 태도 같은 것들이 있겠죠. 그래서 저는 AI의 결과물이 인간 없이 홀로 새로울 순 없다고 믿어요.
창선: AI가 새로울 순 없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는 ‘이기는 디자인’에선 앞장서지 않을까요?
현선: ‘이기는 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종의 평균값을 가장 잘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기는 디자인 위에 뛰어난 디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건 평균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유일성과 의외성이 핵심이라고 믿어요. 정말 뛰어난 디자이너의 결과물을 보면 어떤 면에선 약간 불완전한 부분이 있거든요. 대가들의 작업에는 완전함에서 약간 벗어난, AI가 보기엔 오류 처럼 보이는 포인트가 있고 그 부분이 뛰어난 디자인의 핵심이자 유일함이죠. 이 부분이 AI가 아직까지는 닿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창선: 협업 파트너로서 AI에게 자주 한계를 느끼는 포인트는 뭐예요?
현선: 이건 AI의 문제라기 보다 인간 디자이너의 문제이기도 한데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으면 AI도 활용하기 어렵더라고요. 보통은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결론에 빨리 도달하려고 AI의 도움을 받잖아요. 그런데 디자이너에게 정답의 기준이 없으면, AI가 아무리 답을 내놓아도 그것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죠. 내 주관과 기준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쓰면, 결국 AI의 한계만 느끼게 된다고 생각해요.
창선: AI와 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구간은, AI가 작업을 끝내 놓고 사람의 판단을 기다릴 때 인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사람이 유일한 병목’이라고도 하더라고요. 실제 작업하면서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으세요?
현선 : 자주 그래요. AI가 24시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엄청 똑똑한 비서 같다고 느끼거든요. 얘는 지금 당장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제 고민 때문에 일을 안 시키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단순히 효율만 놓고 따지면 확실히 사람이 비효율적인 존재인 것 맞죠. 그런데 그 시간은 효율, 비효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창선: 저도 ‘병목’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에 사람 머리 속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과물을 이해하고, 처음 의도와 맞춰보고, 조정하고 정제하는 그 과정은 병목이라기보단 정교화 과정이지 않을까 싶어요.
현선: 맞아요. 그래서 멈춰 있는 시간에 실제로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그 과정이 없으면 결국 AI에 끌려가게 되고, 결과물에서 위화감을 느끼거든요. 사람이 병목이 될지언정,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개입이 틀렸다고 생각할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적어도 제 커리어에서는요.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푸는 디자이너
창선: 그래픽 디자인의 기초에서 시작하는 질문을 해보고 싶어요. 디자이너는 어떻게 문제를 정의하고 시작하나요?
현선: 좋은 디자이너는 남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각적 요소에서조차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이에요. 단적으로 어떤 로고를 봤을 때 ‘이 로고 그냥 예쁘고 문제 없어요. 사람들 다 인식 잘하고 좋아하잖아’라고 만족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죠. 좋은 디자이너는 거기서 적확한 문제를 발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단순히 '이 로고는 색깔이 안 예뻐' 같은 감상이 아니라, 브랜드의 심상과 본질을 대조해 무엇이 부족한지 뾰족하게 정의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해요.
창선: 현선님은 토스 앱 안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개하시죠. 토스에서 그래픽 디자인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현선: 크게 세 가지를 얘기해요. 직관성, 심미성, 일관성. 직관성은 ‘이 화면이 이런 정보를 전달하고 있구나’ 곧바로 인지하게 만드는 거죠. 토스는 그래픽을 감상하는 서비스가 아니잖아요. 서비스가 가진 밸류를 명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사용자가 글을 읽지 않고 그래픽만 보더라도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해요.
두 번째 심미성은,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토스 특유의 심미적 가치를 느끼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심미성은 세 번째 요소인 일관성과 연결지어서 생각해야 하는데요. 모든 서비스들이 토스라는 하나의 브랜드 안에 놓인 만큼 비주얼도 일관돼야 하거든요. 뉴진스나 젠틀몬스터의 심미성이 좋다고 해서 ‘토스에서도 써볼까?’ 하면 일관성이 떨어지고 토스의 심미적 가치도 영향을 받거든요. 결국 일관성은 ‘토스가 말하는 심미성’이고 토스 앱의 어느 화면에 있어도 ‘내가 지금 토스를 쓰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창선: 셋 중에서 AI가 가장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가치는 역시 ‘일관성’일까요?
현선: 맞아요. AI는 평균의 천재에요. 모수가 많은 그래픽 에셋을 최대한 많이 학습한 뒤 이걸 다양한 형태로 생산할 때 유용한 툴이죠. 토스의 AI 그래픽 생성기 ‘토스트(Tosst)’가 AI의 일관성 영역을 극대화한 대표적인 시스템이에요. 가끔 어떤 면에선 토스트(Tosst)야말로 인간보다 더 일관성을 잘 지키면서 작업하는 존재로 느껴지기도 해요. 토스가 가진 높은 수준의 심미성을 일관되게 학습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토스팀이 토스다운 그래픽을 누릴 수 있죠.

토스의 AI 그래픽 생성기, 토스트 (Tosst)
창선: AI가 일관성이라는 트랙을 충실하게 유지하는데 강점이 있다면, 반대로 기존의 디자인 트랙을 넓게 확장하거나 아예 새로운 시도를 제시 하는 것은 어려울까요?
현선: 그건 AI의 문제라기보단 결국 사람의 문제 아닐까요? AI는 사람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해주죠. 늘 그렇듯 관심 없는 태도로요. 요즘 트렌드도 분석해주고 지금껏 해온 작업 과정과 브랜드의 맥락을 총동원해서 저에게 정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해주겠지만, 이 제안의 수용 여부는 결국 인간 디자이너의 결정에 달려있어요.
창선: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AI가 새롭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시해도 결국 결정은 제 몫이고, 무엇보다 제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더라고요.
현선: 선택과 결정에 대한 개인의 자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회사와 조직의 관점이 중요하겠죠. 예를 들어 제가 AI에게 토스의 3D 디자인 다음 아이디어를 제안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AI가 이런 저런 근거로 ‘드로잉이나 스케치 스타일은 어때요?’ 라고 제안을 해준다면, 저는 제 생각보다도 토스 브랜드와 조직의 맥락을 먼저 고려할 것 같아요.
토스는 결국 공감의 문화잖아요. 스케치 스타일로 바꾼다고 했을 때 이게 지금 이 회사의 공기와 맞는 결정인지 지난 몇 년간 토스가 쌓아온 맥락과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걸 함께 만들어야 하는 동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먼저 떠올리겠죠. 아이디어 자체의 좋고 나쁨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맥락까지 전부 학습시켜서 AI에게 의견을 물어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제가 회의실에서 느끼는 감각이나 대면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주고 받는 반응 같은 건 제 몸으로 겪는 거잖아요. 디자인 작업은 제 자리에 앉아서 하지만, 디자이너의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생존의 디자이너
창선: 이제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디자이너 한 명이 전보다 몇 배의 작업을 해내게 된 만큼 디자이너의 자리는 정말 줄어들고 있나요?
현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막 디자인 씬에 들어와서 커리어를 키워나가려는 주니어 디자이너에게는 불리한 시장이 됐어요. 시니어리티에 대해서는 그들의 경험에 대한 존중과 라포가 있는 반면에 ‘우리가 왜 신입을 채용해야 하지?’ 라는 질문에는 모든 기업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저는 채용의 어려움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주니어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역량과 경험을 쌓는 과정의 어려움이 좀 더 걱정돼요. 만약 제가 학생때 지금과 같은 AI 디자인 툴을 접했다면 아마 이 기술에 압도당했을 거예요. 내 디자인의 완성도와 디테일을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하는 시기인데, 스스로 아직 할 수 없는 뛰어난 디자인 산출물을 AI가 너무나 쉽게 뱉어내잖아요. 기술에 압도당해서 ‘AI를 잘 쓰는 것만이 나의 길이야’ 라는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을 잘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향하게 되거든요. 지금 주니어 디자이너들에게도 디자인을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요.
창선: 노력의 문제라기보단 시대와 환경의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지금 젊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건 뭘까요?
현선 : 내 손으로 얻은 실패를 통해 안목의 근육을 키우는 게 중요해요. 단순히 좋은 것들을 많이 보는 건 정말 쉬워졌어요. 레퍼런스 찾기도 쉽고, 정보 접근성도 높고, AI로 원하는 자료들을 찾고 수집하는게 용이해졌잖아요. 그런데 저는 보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하는 것’으로 키워지는 안목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모션 그래픽 감각이라는 건 모션 그래픽을 무조건 많이 본다고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직접 모션 프레임을 하나 하나 잡아 봐야 얻을 수 있는 실질적 감각이 있어요. 벽에 부딪히고 실패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고, 그게 디자이너의 근육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AI가 실패를 대신 해줄 순 없죠.
창선: 보통 미적 안목은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안목도 키울 수 있는 건가요?
현선: 무조건 키울 수 있어요. 학교 다닐때 한 디자인 교수님이 이런 조언을 해주셨거든요. “비싸고 좋은 걸 봐라. 손으로 만져보고 써보고 느껴봐라.” 그때 저희는 돈이 없어서 그런 좋은 걸 살 수 없다고 불평했죠. 사실 교수님의 의도는 돈 주고 비싼 걸 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백화점이나 매장에 가서 비싸고 좋은 제품을 자주 착용해보고 만져보고 살펴보라는 의미였어요. 같은 시계인데 어떤 건 몇 만 원이고 어떤 건 왜 몇천만 원인지, 그 가치의 차이가 실물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눈과 피부로 감지하는 훈련을 해보라는 뜻이었죠.
사진이나 화면으로만 보면 길거리에서 파는 시계와 명품 매장의 시계가 드라마틱하게 달라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직접 만져보고 뜯어보는 과정에서 디테일과 소재, 마감, 그리고 브랜드가 쌓아온 역사 같은 것들을 알게 되죠. 그런 현실 세계에서의 탐구가 디자인의 기초 체력이 되는 거고, 곧 안목을 기르는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창선: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AI 임팩트 앞에서 대체되지 않을 인간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현선: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통역이에요. 언어 모델은 텍스트와 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하고, 이미지 모델은 이미지로 세상을 이해하는데 이 둘이 서로 다른 나라 말처럼 통역이 잘 안되고 있는 것을 느껴요. 예를 들면 ‘심플함’이라는 키워드를 잡고 이미지화 한다고 했을때 단어는 ‘심플함’ 하나지만 사람과 모델이 이해하는 ‘심플함’엔 수많은 버전이 있잖아요. 수많은 심상과 언어 사이에서 가장 정확한 통역을 제공하는게 인간 디자이너의 역할이죠. AI가 쏟아낸 답안지 중에서 무엇이 그 언어에 가장 가까운 디자인인지 판단하는 건 결국 인간 디자이너의 몫이에요.
두 번째는 책임이에요. 지금 AI 디자인 툴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는 이 툴을 도구로 생각하지, 의뢰를 맡기거나 책임을 묻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진 않잖아요. 비용 때문에 처리해야 하는 디자인 작업은 AI로 빠르게 쳐내겠지만 정말 중요한 디자인 의뢰는 결국 사람에게 향해요. 디자이너의 안목과 관점을 믿고 맡기는 거니까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에요 .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논의 끝에 ‘이제 세상에 내보내도 된다’고 결정하는 것. 이것만큼은 인간 디자이너의 역할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5년 뒤에 뭘 하고 계실 것 같으세요?”
2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에서 고현선이 가장 오래 답을 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지금까지 디자이너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저 디자이너일 거라고 말했다. 고현선은 인터뷰 내내 AI에 대해 쉽게 단언하지 않았다. 그는 쉽게 확언하고 예측하는 대신, 디자이너로서 늘 해왔던 일에 여전히 시간을 쓴다. 멈추고 생각하고 고르고 책임지는 일. 그는 늘 병목의 자리에 서있다.

Interview·Edit 김창선 Photo 스튜디오펩스
변화 속에서 시대의 기준을 탐구하는 토스의 지식 팟캐스트입니다. 커리어, 기술, 철학 등 각 분야의 현장을 지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로, 지금 세상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차분하고 밀도 있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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