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연대기: 행운을 사고 팔던 기록
조선시대: 만 명이 모여 뽑았다, 조선판 로또
우리나라 복권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계(契)’를 만난다. 소규모 친목 모임을 생각하지 마시라. 조선 후기에는 계의 규모에 따라 이름도 달리 붙였는데, 100명이 모이면 ‘작백계’, 1,000명이면 ‘천인계’, 10,000명이면 ‘만인계’라고 불렀다. 계원들에게 일정액의 곗돈을 걷은 후 정해진 날 추첨을 통해 당첨자를 뽑아 모인 돈의 약 80%를 복채금(당첨금)으로 지급하는 형태였다.
그 중에서도 만인계 인기가 높았다. 추첨일이 되면 마을 공터나 산비탈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둥그런 나무통에 추첨 번호를 넣어 돌리는 방식으로 당첨자를 뽑았다. 당첨금의 일정 금액은 지방 관청에 납부했고, 관청은 이 돈을 도로나 다리 같은 지역 인프라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만인계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청년 시절 만인계의 사장을 맡았던 것이다. 20대 초반, 괄괄하고 리더십 강한 성격의 안중근은 우연한 계기로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하는 채표 회사 사장이 되었다. 추첨이 있던 날 수만명이 모였는데 당첨자를 뽑는 통에 문제가 생겼다. 번호표가 한 장만 나와야 하는데 여러 장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군중은 흥분했고 ‘사기다!’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을 휘둘렀다. 이 찰나에 안중근은 총을 꺼내며 외쳤다. “내가 쏟은 게 아니고, 이 통이 쏟아진 것을 왜 나를 죽이네 살리네 한단 말이오!” 20대의 안중근 의사는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인계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자금을 모았고, 그 중 일부를 공공에 환원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복권 제도와 유사하다.
해방 이후: 복권이 나라를 살릴 수도 있을까?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35년간의 식민지 생활 후 200만 명이 넘는 재외 동포의 귀환, 그리고 6.25 전쟁의 발발. 나라는 지독히 가난했다. 정부는 구호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복권을 발행하였다. 1949년 10월부터 1960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후생 복표’라는 이름의 복권을 발행해 복권 1매당 200원씩 판매했고, 당첨금은 1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의 수억 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이후에도 전후 사업 부흥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애국 복권’을 발행했다. 이 시기의 복권은 국가 재건을 위한 절박한 선택지였다.
복권과 관련하여 애틋한 사연도 있다. 1948년은 제14회 런던올림픽이 개최되는 해. 우리나라는 선수단의 식비나 교통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독립운동가 출신의 전경무를 중심으로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후원권’이라는 복권을 발행한다. 1등 100만 원, 2등 50만 원, 3등 10만 원의 당첨금을 걸었던 복권은 성공적으로 판매되었고, 그 결과 약 8만 달러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덕분에 대한민국 선수단은 런던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독립국가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무대를 경험 할 수 있었고 놀랍게도 권투와 역도에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1946년 창설된 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를 파견하는 역할을 해왔고, 2009년에는 대한체육회로 통합되었다.

제14회 런던올림픽 후원권. 복권에 대한올림픽 부위원장이었던 전경무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임시정부를 도왔던 전경무는 해방 후 체육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했고 직접 IOC에 대한민국의 참가를 신청하러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 출처: 국가유산청
중세 유럽에서도 복권은 국가 재정의 숨은 도구였다. 16세기 중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함정을 건조하고 항구를 정비할 목적으로 복권을 발행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군주 루이 14세의 사치와 전쟁으로 바닥나버린 국고를 메우기 위해 루이 15세는 복권을 도입했는데 이를 통해 200만 프랑의 매출을 올렸고 그중 1/4을 파리의 공공사업에 투자했다.
이처럼 복권은 국가 재정 정책에 있어 부수적이지만 쏠쏠한 수단이 되었고 복지와 공공 기반 확충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는 복권 발행에 따른 사행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식의 복권 사업을 직접 주도하거나 독점적으로 관리해 온 것이다.
70년대: 준비하시고- 쏘세요
1969년 9월 15일 첫 발행된 ‘주택복권’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기 발행된 복권이었다. 과거 복권이 ‘후생 복표’, ‘애국 복권’ 등 특정한 목적에 따라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과 달리 주택복권은 월 1회, 주 1회 식으로 정기적으로 운영되어 국민 곁으로 적극 다가왔다.
1970년대 들어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국민들이 ‘내 집 마련’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고 이에 부응하면서 주택복권이 등장했다. 당시 주택복권은 한국주택은행이 발행했는데 저소득층 주거 안정 사업 지원을 표방하며 1969년 9월 15일 복권 1매당 100원씩, 발행 총액 5천만 원, 1등 당첨금을 3백만 원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매일경제신문에 게재된 제1회 주택복권 발매 광고 / 출처: 매일경제
주택복권 추첨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는데 흑백TV가 보급되면서 시작된 진기한 풍경이었다. 당첨자 선정은 숫자가 적힌 원반을 돌린 뒤 화살을 쏘아 당첨 번호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는 당시 최고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복권 추첨이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된 것이다.
주택복권은 빠르게 대중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초기에는 월 1회 발행되었지만, 점차 발행주기가 늘어나 1972년에는 주 1회로 확대되었고, 당첨금은 하루가 빠르게 높아졌다. 1969년 1등 당첨금은 300만 원. 6년 후인 1975년 8월 경에는 900만 원, 1984년 중반에는 1억 원으로 당첨금은 수직 상승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의 경제 성장과 물가 상승, 무엇보다 집값의 오름세가 가팔랐다.
당시 신문에는 ‘주택 복권 인기 시들’, ‘당첨 금액 파격적으로 높여’ 같은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정부는 복권을 통해 건설·교통 분야의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고, 당첨금을 인상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유지하려 했다.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주택복권은, 1983년 올림픽복권이 발행되면서 잠정 중단될 때까지 총 574회 발행되었고, 약 1,016억 원 규모가 판매되었다. 이를 통해 수해주택, 원호주택, 국가유공자 주택, 임대주택, 영세민주택 건설 등 약 4만 5천 호를 지원했다.
90년대: 기다림은 가고 긁는 시대가 왔다
1990년대 주택복권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 가던 무렵, 정부는 새로운 형태의 복권을 선보인다. 1990년 9월 1일, ‘엑스포 복권’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88서울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국제행사였다. 정부는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해 ‘즉석 복권’이라는 아이디어를 꺼내 든다. 복권을 사고 일주일이나 기다릴 필요 없이 복권을 긁자마자 당첨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최초의 즉석 복권인 엑스포 복권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3억 1,000장이 발행되었고, 총 415억 원의 판매 수익을 기록했다. 엑스포 복권이 성공하자, 여러 종류의 즉석 복권이 등장했는데 한 장을 사면 최대 6번이나 추첨할 수 있는 ‘또또복권’ 같은 새로운 컨셉의 복권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1998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어야만 했고, 복권 시장 역시 그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시기 정부 부처와 지자체는 복권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국토교통부의 주택복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기술복권, 보건복지부의 엔젤복권 심지어 제주도의 관광복권 등 무려 21개의 부처나 지자체가 복권 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복권 사업 특혜 시비, 복권 기금 집행 문제 등 각종 문제가 발생며 복권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추락하고 만다.
2000년대: 407억 원 당첨자의 등장과 로또 열풍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부는 2002년 정부의 복권사업을 통합하고, 복권 기금의 엄정한 운영을 위한 복권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 결과 ‘로또’가 등장하며 복권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인생 역전’을 내세우며 2002년 12월 등장한 ‘로또’는 그야말로 열풍을 일으켰다. 이전 복권과 달리 최고 당첨금액의 제한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로또가 발행된 지 몇 달 안 된 2003년 4월 제19회차의 1등 당첨자가 407억 원의 당첨금을 받게 되면서 당시 전국은 로또 열풍에 몸살을 앓았다. 수백, 수천만원의 돈을 들여서 복권 구매에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복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중 24.4%는 한 달에 한 번 로또복권을 구매한다고 한다. 로또를 살 때 50.5%는 5천 원 이하를, 34.3%는 5천 원에서 1만 원 사이를 지출해, 대체로 소액을 구매하는 편이다. *전국 만19세 이상 성인남녀 1,020명을 대상으로 2024년 실시
로또복권의 판매액 역시 지난 10년간 꾸준히 상승해 왔다. 2013년 2조 9,896억 원이었던 판매액은 이후 매년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늘어나, 2021년에는 5조 원을 돌파했고 2024년 상반기 기준으로는 5조 6,562억 원에 이르렀다. 판매액과 조사 결과를 보면, 로또 구매가 고정 소비 행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복권을 사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일확천금을 바라고, 누군가는 그저 단순히 재미를 즐긴다. 하지만 개인의 기대와는 별개로, 복권은 오랫동안 국가 운영의 일부로 기능해 온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다. 복권 수익금은 당첨자의 몫으로 모두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복권 1,000원 어치를 사면, 그 중 410원이 복권기금으로 조성된다. 복권기금의 35%는 과학기술진흥기금, 중소기업창업 및 진흥기금 등 10개 법정배분기관에 법적으로 배분되며, 나머지 65%는 저소득층 임대주택 건설, 장애인·불우청소년 등 소외계층 지원 사업에 쓰이고 있다.
복권의 사행성에 대한 비판이 고조될 때마다 복권의 공익적인 기능이 강조되지만,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복권 당첨 열풍과 그로 인한 중독과 상실감 등 사회적 후유증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복권은 우연의 미학이다. ‘어쩌면’이라는 희박한 가능성을 사고파는 구조이고, 국가는 바로 이러한 ‘운’을 이용해 손쉽게 재정을 거둬들인다. 복권은 때로는 설레는 기대이지만, 지나치면 착각이 되고 중독이 되고 삶을 파멸로 몰고갈 수도 있다. 한 장의 복권은 가벼워야 한다. 복권에 인생을, 혹은 재정을 걸기 시작할 때부터 국민이건 정부 건 건강한 균형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윤자영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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