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사교육비로 얼마를 썼을까?
4살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세상이다. 초등 영어학원 입학시험인 이른바 ‘7세 고시’를 넘어 영어유치원 입학 레벨테스트인 ‘4세 고시’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사교육 시장은 더 빠르고 더 크게 팽창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사교육비는 29조 원으로 해마다 5~7%씩 늘어나고 있다. 30조에 육박하는 돈이 움직이는 이 시장은, 교육부 2025년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달한다. 1인당 사교육비를 보면 더 적나라하다. 학생 수는 1년 사이 8만 명(1.5%) 줄었지만,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7만 4천 원으로 오히려 10% 가까이 증가했다.*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교육부, 통계청
입시 이야기가 나오면 부모들은 걱정이 앞선다. 명문대 중심의 서열 구조, ‘고학력=고소득’이라는 오래된 공식, 줄지 않는 사교육비, 자주 바뀌는 교육 정책 등. 무엇이 문제인지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경쟁은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 ‘끝없는 경쟁’의 풍경은 사실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14년 N수생, 논밭까지 다 팔아버린 과거시험 생존기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盧尙樞, 1746~1829)’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 5백여 냥은 모두 과거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공명(功名)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 (1872.5.7) 과열된 입시 구조는 조선 시대에도 비슷했다. 노상추는 무과에 급제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고, 합격 후 관직에 올라 정식으로 녹봉을 받는 데까지 다시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무려 14년을 꼬박 무관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기간 동안 별다른 수입 없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재산을 써가며 생활해야 했다.
노상추가 상속으로 받은 재산은 ‘논 한 섬 아홉 마지기와 밭 아흔여 마지기’였지만, 과채(科債), 즉 과거시험을 보고 나서 남은 것은 ‘대지(垈地) 다섯 마지기와 박답(薄畓) 여덟 마지기’였다. 어림 계산해보면 과거시험 비용으로 상속의 절반을 썼는데 남아있는 것이 대지, 즉 집터와 박답, 기름지지 못한 논이었다. 이를 현찰로 환산하면 5백여 냥. 무관이 되어 얻게 되는 명예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굶어 죽을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말인가.
노상추는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나 그 인근에서 평생을 살았다. 전형적인 영남 유생이었고, 문신을 여럿 배출한 나름의 명문가였다. 그 역시 처음에는 문과를 꿈꿨지만 무과로 방향을 틀었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전략과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관이 무관보다 명예롭고 대우도 높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심했다. 조선 후기에는 무관의 사회적 지위도 나아졌고, 무엇보다 문과에 비해 훨씬 많은 인원을 뽑았기 때문에 합격 가능성이 문관보다 높았다.
여기에 경제적 계산도 있었다. 경상도 선산에서 한양까지는 약 380km. 걸어서 부지런히 이동한다고 해도 약 보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터였다.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하려면 여러번 시험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체류비와 여비도 고려해야 하는데 역시 문과보다는 무과가 상대적으로 ‘손해가 덜 나는’ 선택이었다. 노상추는 나름의 계산을 통해 시험에 도전했지만, 조선의 시험 운영은 그의 예측을 번번이 뒤엎었다.
노상추는 23살부터 본격적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 26살에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갔지만,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라 시험은 갑작스레 취소되었다. 31살에 다시 상경했지만, 정월에 치르기로 했던 시험은 두 달이나 미뤄졌고, 그마저도 영조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취소되었다. 조선의 경우 3년에 한 번씩 ‘식년시’라는 이름으로 정기시험을 보았지만, ‘별시’라는 이름의 특별시험이 자주 있었고, 왕실의 사정에 따라 갑자기 시험이 취소되는 등 과거제도 운영에 미숙한 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 지방에 사는 유생들은 대단히 불리했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여비와 체류하는 비용 등 돈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노상추는 물러서지 않았다. 1777년, 1778년 두 번의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포기하지 않은 노상추는 1779년 드디어 지역 시험을 통과해 1980년 35살의 나이로 비로소 무과 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마지막 시험을 위해 한 달 동안 한양에 머물러야 했는데, 이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척에게 밭 열두 마지기를 팔았다.
노상추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쓴 돈은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쓴 돈. 둘째, 과거 공부 기간 동안의 생활비. 셋째, 한양 체류비. 넷째, 이동 중에 들어간 품삯 및 노비 대동 비용 등이 그것이다. 공부를 하려면 책을 사야하고 서당부터 서원까지 스승님을 모셔야 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교재비와 학원비에 해당하는 돈이다.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지만 과거 시험은 오랜 기간 공부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모아놓은 재산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집안이 대지주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어지간한 중소지주의 경우 땅을 팔아가면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한양에 머물기 위해서는 집을 빌려야 했고, 식사를 하기 위해 주막 등을 이용하는 등 모든 것이 돈! 돈! 돈이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한양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집값이 크게 올랐고 물가도 매우 높았으니 요즘 대학생들의 하숙비처럼 부담되었을 것이다. 노상추의 경우 무려 14년간 과거시험을 준비해야했고 이 기간 동안 노상추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왜 우리는 시험에 매달리는가
과거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붓던 조선 시대의 풍경은 지금 상상해도 놀랍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당시 향시(鄕試)의 실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정(丁)자도 모르면서 거벽(巨擘)의 글을 빌리고, 사수(寫手)의 글씨를 빌려 시권을 바친다. 향시(鄕試)가 이 모양이니 경시(京試)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회시에서는 사람을 사서 대신 들여보내어 짓고 쓰며, 위조하고, 세력 있는 자와 통한다.”
거벽은 문장에 능한 사람, 사수는 글씨에 능한 사람을 뜻한다. 향시는 고향에서 보는 1차 시험, 회시는 서울에서 보는 2차 시험, 경시는 서울에서 보는 시험이기 때문에 별시나 전시를 이야기한 듯 하다. 과거를 합격하려면 최소 3번을 합격해야 하는데, 그중 2번의 시험을 서울에서 치렀다.
정약용의 글을 따라 상상해 보시라. 아무것도 모르는 귀한 집 자식이 앉아 있고, 그 옆에서 거벽이 문제를 분석해 “이렇게 쓰시오.” 하면, 한문을 잘 쓰는 사수가 좋은 필체로 내용을 적어주는 풍경을 말이다. 과거 시험장에도 당연히 감독관이 있었지만 명문가 도련님이 왔기 때문에 ‘불법을 막아야 하는 금란관은 머리를 감싸고 숨을 곳을 찾았다’라고 정약용은 고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입시 경쟁은 시간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15세기 소과시험*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25세. 하지만 19세기 후반이 되면 37세로 오른다. 문과 최종 합격자의 경우 조선시대 평균이 36세인데, 18세기 후반이 되면 40세에 이르렀다. 응시자 수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세종 때 1,000여 명이던 한성시** 응시자는 선조 때 2,000명, 인조 때 4,000명, 1707년 숙종 33년에는 무려 11,000명까지 늘었다. 세도정치기 때는 평균 5~6만 명, 고종 때는 무려 11만 명이 되었다. 물론 500년간의 이야기이고 인구성장, 합격 인원의 증가 등 변동 요소를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과거시험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있었다. *향시, 고향에서 보는 1차 시험 **한성에서 치루던 문과·무과·생원진사시의 1차 시험
상황이 이러니 기이한 기록도 등장한다. 영조 때 이요팔은 81세, 신수채는 84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개인과 가문에는 경사였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사실상 평생을 과거시험에 매달렸으며, 합격의 영예를 누리긴 했지만 실질적인 관직을 얻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 3대가 함께 과거시험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거짓이 아니었다.
경쟁이 심해지자 온갖 부정이 횡행했고, 황당한 사건도 벌어졌다. 조선 후기 학자 이옥은 《유광억전》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영남 제일의 인재’라 불리던 사람이 대필 시험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결국 들켜 자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흔히 곤장으로 알고 있는 장형을 받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시험에 목숨을 걸고, 부정에 손을 대고, 들키면 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였다.
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과거시험에 매달렸을까. 양반 중심 사회에서 과거 합격만이 신분 상승의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14년간 무과 시험에 도전한 노상추 역시 마찬가지. 무관이 된다는 것은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분명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명예를 얻기 위해 노상추가 감내한 비용은 삶을 위협할 만큼 컸다. 시험 운영의 미숙함, 지방 유생의 불리함, 수차례의 취소와 연기 속에서 그는 오로지 ‘신분 상승’이라는 목표 하나만 의지해 버텼다. 그리고 그의 14년은 오늘날의 과열된 입시 구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준하는 각종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조선 후기였으니 오늘날에 비한다면 국민의 80%가 대학에 입학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학 서열은 강고하고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딱히 성공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얼마 전 또 한 번의 수능이 끝났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자부심을, 또 누군가는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연스럽고,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다. 조선 시대 노상추의 일기장에 적힌 문구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음을 보여주지만, 또다른 사실도 말해준다. 시험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공명은 시험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힘을 내자. 그리고 아픔을 경험삼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필진 글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