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는 언제 기회가 되고, 언제 위기가 될까?

심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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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빌린 것보다 더 많이 갚던 시대

“그런 난리판에도 부자들만은 흉년 덕을 톡톡히 보았거든.” “흉년 덕이라뇨?” “땅값이 워낙 싸졌으니 그렇지. 당장 굶어 죽는 판에 논밭이 쓸 데 있는가! 그저 지낼 만한 댁에 가서 흰죽 한두 그릇 얻어먹고는 두서너 마지기씩 척척 바쳤거든. 실은 네 칠촌댁 재산도 거의 그때 걸태질해 들인 것이지만 말야. 우리도 논마지기 종이 갖다 바쳤지...” -김정한, 《사하촌》 중, 1936

김정한의 소설 《사하촌》을 보면 일제강점기 소작제도의 현실이 얼마나 고단했는지가 잘 묘사된다. 풍년이면 쌀값이 싸져서 돈을 못벌고, 흉년이면 내다 팔 쌀이 없어서 돈을 못벌었다. 조선 후기 민중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자식들은 먹여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대출 이자에 시달리듯 그때의 민중들은 동네 양반지주들에게 땅과 쌀을 빌렸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당시 ‘장리’라고 불렸던 이자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1년에 5할’, 보릿고개 시절 쌀을 빌리면 50%를 더하여 갚는 방식인데 ‘십오지사채’라고도 불렸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의 세금을 내지만 땅을 빌리면 이자를 두 배 이상을 내야 했다. 비율제였기 때문에 쌀 100석을 생산하면 50석, 150석을 생산하면 75석을 내야하는 식이었다. 식량이 부족한 봄철, 이른바 춘궁기에 쌀을 빌리면 또다시 50%의 이자가 붙었다. 그 결과 추수 때가 되면 생산량의 60~80%를 이자로 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임술농민봉기(1862), 동학농민운동(1894) 등 구한말 농민들의 저항이 계속된 이유도 결국은 무자비한 이자 때문이었다.

소작 문제는 일제강점기 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제국주의 본국에서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순사들은 모른 척으로 일관했고 총독부는 지주 편이었기 때문에 농민은 소작권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소설 《사하촌》에서는 갑자기 소작권을 빼앗겨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농민 이야기부터 위에 나온 것처럼 빚을 감당하지 못하다 자신의 땅마저 빼앗기는 온갖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자는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지만, 그 역사는 오래됐다. ‘돈놀이’나 ‘사채’ 같은 표현이 말해주듯,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에 대한 경계와 불신은 고대부터 존재해왔다. 돈이나 땅을 빌려주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자를 감당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방식 역시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하지만 근대 산업혁명을 거치며 이자의 의미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금융 제도가 정비되고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자는 개인 간 거래를 넘어 보다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경제 활동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자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대를 앞서간 ‘지아니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회: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백설공주

아마데오 지아니니(1870~1949)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와 국가 재건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미국에 자리를 잡았고 지아니니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 지아니니 역시 13살의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고 우연한 기회에 임대사업을 접한 후 장인의 부동산 사업을 도우며 돈의 흐름을 익혀갔다.

31살이 되던 해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지아니니는 샌프란시스코에 ‘뱅크 오브 이탈리아(Bank of Italy)’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금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신용도가 낮아 기존 은행에서는 담보를 통한 대출이 불가능한 이들을 상대로 한 회사였다.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린 셈이지만, 대출 규모가 낮고 연체 위험 또한 높기 때문에 큰 수익을 보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했다.

2년간 어렵게 회사를 꾸려오던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대지진이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지아니니는 곧장 은행으로 달려가 200만 달러 규모의 금과 현금, 유가증권 등을 간신히 챙겨 나온다. 이날 지진은 규모 8.3으로, 약 3,000명의 사망자와 도시 인구의 절반을 넘는 23만 명의 이재민을 남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 재해였다. 지진의 여파로 화재가 잇따르면서 지역의 군소 은행들은 무너졌고, 일부 은행은 금고가 녹아내릴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공중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빠른 대응으로 자신과 고객의 자산을 지켜낸 지아니니에게 재난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북쪽 해변 근처 부두에 자리를 잡고 나무 판자와 배럴을 책상 삼아,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대지진과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 기존 은행들은 뻣뻣하게 굴었다.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아니니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사업 계획이 분명하다면 구매 물품을 담보 삼아 대출을 실행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작은 술집을 개조해 쓰던 은행은 곧 샌프란시스코 리틀 이탤리의 상징인 콜럼버스타워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소상공인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금융을 설계한 지아니니의 방식이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금융은 미국 동부, 특히 뉴욕의 금융기관들이 꽉 잡고 있었고, 이들은 미국 서부를 변방으로 여겼다. 급변하던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의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 미국 서부는 뜨거웠다. 일명 골드러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항구와 철도같은 대단위 사업은 물론이고 이민자를 중심으로 과일, 와인, 통조림 등 농업과 식품산업이 커나가고 있었다. 지진에도 불구하고 재건 붐이 일며 서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호황기와 전쟁기를 거치며 그는 적극적인 대출을 이어갔고, 주법 은행과 국법 은행으로 나뉘어 있던 미국의 금융 시스템을 유연하게 활용해 사업을 빠르게 확장했다. 기존의 사업을 키우고 새로운 은행을 인수합병하는 가운데 그의 은행은 192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금융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를 상대하던 꼬마은행 사업가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은행으로 성장하기까지. 지아니니는 합병과 인수를 거듭하며 기업이나 정치권과 교묘히 결탁하는 등 미국 금융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뚝심과 소외된 영역에 과감히 투자하는 방식은 통했다.

그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대출을 주관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동화로 만든 만화영화를 누가 보겠느냐’는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아니니는 제작 중이던 영화의 일부를 직접 확인한 뒤, 영화 필름 자체를 담보로 자금을 내주었다. 당시 디즈니는 제작비가 200만 달러 이상 초과되어 난항을 겪고 있었는데, 지아니니의 투자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다.

이후 찰리 채플린을 비롯해 20세기 폭스, 컬럼비아 영화사 등 여러 창작자와 기업이 지아니니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20세기 미국 대중문화사에서 그의 안목있는 투자 방식은 문화 산업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서: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FED의 정책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을 괴롭혔던 소작료, 그리고 산업혁명기 이탈리아 이민자들과 새로운 사업에 도움을 주었던 지아니니의 대출 사업.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자'는 매우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도한 이자는 삶을 위협하지만, 이자 수익을 전제로 한 과감한 투자가 없으면 산업은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생계와 성장, 개인의 삶과 국가 경제. 이자는 이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아마 이 지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장 분명하게 수행한 인물이 매리너 애클스(Marriner Stoddard Eccles, 1890~1977)일 것이다. 사업가 출신이었던 그는 민주당 정부에서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의 위상을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통화금융정책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제도, 보통 약자인 FED(Federal Reserve System)로 불린다.

애클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정부에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연준은 여전히 19세기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른바 ‘진성어음주의’라 불리던 원칙에 따라, 경제활동에 적정한 상업어음을 할인해주는 것이 중앙은행의 역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제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실물경제를 조용히 뒷받침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하지만 애클스가 살았던 시대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했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6.25전쟁까지 벌어졌다. 국가도 개인도, 급변하는 정세에 위협받던 시기였다. 애클스가 보기에 적정한 통화정책과 규제정책의 실천은 단순히 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것을 넘어 국민들의 삶을 돌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경기가 침체될 때는 숨통을 틔워주고, 반대로 과열될 때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시장의 성장을 무작정 뒷받침하기보다, 물가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을 함께 관리하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애클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했고, 연방준비제도법 개정 등 굵직한 제도 개혁을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그는 연준의 독립과 자율성을 위한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재무부 장관과 차관의 연준 참여를 제한하고, 연준 이사의 교체 주기도 정권 교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조정했으며, 대통령의 임기 동안 연준 위원 임명에 제한을 두었다. 즉, 로비스트들에 크게 영향을 받는 정권의 이해 관계를 벗어나 거시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었다. 소위 ‘금리 정책’을 통해 국민 경제의 안정을 기하는 방식, 대출 이자의 적정성을 도모하면서 기업과 가계에 도움이 되는 전통이 애클스에 의해 본격화된 것이다.

침식: 나라를 담보로 한 대출

조선 말 국가의 재정 상태는 엉망이었다. ‘나라에는 한 달 쓸 비축도 없다’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양 열강과 청나라,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면 국가 주도의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철도를 놓고 전신을 연결하는 대단위 산업을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자금이 필요했고, 조선은 결정적으로 자금이 부족했다.

이 와중에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견됐고, 이때 중국의 정치인 이홍장은 자신의 심복인 원세개(위안스카이)를 함께 보낸다. 원세개의 목표는 명확했다.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주고 조선을 청나라에 예속시킬 것. 정치력을 극대화하여 일본의 간섭을 뿌리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것. 이러한 원칙하에 원세개는 적극적인 차관 정책을 추진하였다.

1882년 8월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50만 냥의 돈을 연이자 8리(0.8%), 거치 7년 상환 조건으로 빌렸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빌려온 대규모 차관이었다. 1885년 6월에는 ‘의주전선 조약’을 체결했는데 전신 시설을 위해 5년 거치 20년 기한으로 10만 냥의 차관을 또 빌렸다. 이 조약은 파격적이었다. 이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매년 5,000냥씩 무이자 상환을 하되 상환이 어려울 경우 전선부설권 및 관리권을 청나라가 갖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1889년이 되면 조선이 청나라에게 빌린 돈이 130만 냥에 달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때 피해를 이유로 배상금을 요구했던 일본의 5만 냥을 갚지 못해 세창양행* 같은 해외 기업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세개는 끊임없는 내정간섭을 통해 청나라 이외의 나라에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막았고, 그만큼 조선의 시장과 산업을 지배하였다. 물론 이 시도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의해 완전히 패배하면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일본은 같은 방식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다. *1884년 독일 마이어 상사(Meyer 商社)의 제물포 지점으로 설립된 무역상사. 근대화 정책을 명분으로 독일산 기계와 기술자 도입을 담당하며 각종 이권을 확보한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사례는 19-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소국을 지배해온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자금에 의존하게 한 후, 빚은 점차 통제와 간섭으로 이어졌다. 돈을 빌려 감당할 수 없는 이자의 늪에 빠지는 것은 개인의 생계를 넘어, 때로는 국가의 존망까지 좌우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사실 대출이자 몇 퍼센트가 올랐냐, 떨어졌냐를 두고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다. 하지만 금리라는 숫자 뒤에는 언제나 더 큰 이야기가 놓여있다.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역사적 사례처럼 정부의 정책, 경기의 흐름, 그리고 국제사회의 변화 같은 구조적인 배경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아니니와 애클스가 좋은 선례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자와 금리는 책임 있게 다뤄질 때 기회와 질서가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정책을 통해 안정적으로 금리가 관리될 때 사람들은 삶을 잘 꾸리고 미래를 계획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정책의 출발점에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변화하는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있다. 정부는 언제나 국민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보다 이성적이면서도 공공적인 방향을 가리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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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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