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휴가를 어떻게 즐겼을까?

심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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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 없는 직장인들의 1박 2일 심야 소셜 클럽 ‘야연’

1739년 어느 보름밤. 한양 돈의문 밖 월암 바위 근처의 한 연꽃정원에 선비들이 모였다. 당대 유명한 문인이자 화가였던 이인상과 이윤영을 비롯한 이들이 설레는 1박 2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뭉친 것이다. 이 모임의 이름은 ‘서지문회’. 서쪽 연못에 모인 문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말만을 기다리며 고단한 주중을 버텨낸 직장인들이 도심 근교로 바람을 쐬러 떠나듯, 서지문회 멤버들도 바쁜 관료 생활을 잠시 내려놓고 경치 좋은 아지트를 찾은 셈이다. 당시 조선에는 지금처럼 연차나 정기 휴가 같은 공식적인 제도가 없었기에, 이렇게 짬을 내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자체가 호사였다.

관료들에게 허락된 짧은 주말 휴가 같았던 1박 2일. 그때는 과연 어떤 문화가 유행이었을까? 서지문회의 멤버였던 이윤영이 남긴 《서지상하기(西池賞夏記)》를 통해 약 300년 전 그들의 휴가를 따라가 보자.

연못을 둘러싼 것은 대부분 수양버들인데 사이사이에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어놓았다... 달구경하기가 좋은 곳이므로 꽃과 버들 속에 인가가 많다. 주렴, 기둥, 대청, 난간이 물에 거꾸로 비쳐 출렁이니 마치 거울 속의 비친 풍경 같다. 연못 안의 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두었다. -이윤영, 《서지상하기》 중

달 밝은 날 연못을 따라 산책하며 풍광을 즐기던 선비들은 밤이 깊어지면 집에 모여 본격적인 밤샘 모임인 ‘야연(夜宴)’을 시작했다. 이윤영은 이곳의 풍경, 특히 연꽃을 너무 좋아해서 인근에 집을 구입했고 동료들과 함께 풍경과 정취를 즐겼다. 요즘으로 치면 가까운 사람들끼리 분위기 좋은 독채 숙소를 빌려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막 피려는 연꽃을 꺾어서 연잎에 고인 물에 띄우고는, 임매를 시켜 연꽃 한가운데다 유리잔을 놓으라 하고, 이인상에게는 유리잔의 가운데에다 불을 붙이게 하였다. 그랬더니 불빛은 유리잔에 스미고 유리잔은 연꽃 속에 스며들었으며, 꽃빛과 물빛이 또한 연잎으로 스며들었다. -이윤영, 《서지상하기》 중

밤이 깊어지면 꽃과 유리, 얼음을 활용해 독특한 불빛 놀이를 즐겼다. 백자 항아리에 얼음을 얼린 후 안쪽을 파내고, 그곳에 꽃이나 촛불을 넣어 빛을 밝히는 방식이었다. 밤새 불멍을 하거나 감성적인 조명을 켜두고 분위기를 즐기는 것과 비슷했을까?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당시 기준으로 비용이 꽤 많이 드는 값비싼 문화였다는 점이다. 구하기 힘든 얼음과 제철 꽃, 그리고 귀한 수입품인 유리잔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밤을 보내고 해가 중천에 뜨면, 다시 한번 술을 한 잔씩 돌리고 큰 폭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식사까지 마치고 나면 말을 타고 인근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1박 2일, 혹은 2박 3일의 짧은 휴가가 마무리 되었다.

산으로 휴가 떠난 선비들, 조선 시대 글램핑

조선 시대 산을 사랑한 대표 주자로는 퇴계 이황이 있다. 우리는 흔히 그를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관료 생활이 적성에 그리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40대 초반부터 벼슬살이에 염증을 느꼈고, 50세에는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세웠다. 서당에는 매화와 국화, 대나무와 소나무, 연꽃을 심어 친구처럼 가까이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름다운 산을 찾아 길을 떠났다. 오늘날 충북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 있는 ‘옥순봉’과 경북 봉화의 ‘청량산’, 경남 의령의 ‘가례동천’ 등이 퇴계 이황이 특별히 아꼈던 장소들이다. 

이황에게 산행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었다. 그는 산을 여행하는 것을 책을 읽는 과정에 비유하며 ‘독서’라고 말했다. 산행을 할 때 땀을 뻘뻘 흘리듯, 독서 역시 치열한 학문의 과정이기에 그 수고로움이 같이 때문이다. 또한 이황은 산행은 자연을 관찰하고 스스로를 사색하는 반성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충분히 즐기고 누리고 느끼며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므로, 여행을 다녀오면 반드시 후기를 남길 것을 권했다. 지금으로 치면 소셜 미디어에 여행 리뷰를 남긴 셈이다. 그의 권유 덕분인지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선의 유람기만 560편이 넘는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산을 여행했을까. 그 모습은 퇴계의 벗이자 평생의 사상적 경쟁자였던 남명 조식*이 1558년 환갑을 앞두고 떠난 지리산 유람 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지리산은 금강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산 중의 명산으로 주목받았었다. *이황과 조식은 훗날 각각 남인과 북인의 시조가 되는 조선 중기 최고의 유학자들이었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면서 선두 대열을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과 요리사 및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명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갔다. - 조식, 《남명집》 중

조식이 대동한 인원은 무려 40여 명. 행렬의 선두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후미에는 전담 요리사와 종들이 술과 식량을 짊어지고 따랐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한방 소화제인 소합원과 청향유 같은 응급약도 챙겨 떠났다.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요즘 우리가 등산을 갈 때 음악을 듣고 마실 것, 먹을 것, 비상약을 챙기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지금은 휴대폰과 작은 배낭 하나면 모두 가능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를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했던 셈이다.

공짜 대접에서 정당한 거래로, 조선의 관광 산업이 싹트기까지

자연을 즐기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당시 관광 인프라나 경제적 맥락은 크게 달랐다. 지금처럼 숙박 예약 플랫폼이나 고기능성 캠핑 장비가 없기 때문에 조식과 같은 대규모 여행단은 지리산 곳곳에 위치한 '사찰과 암자'를 거점으로 삼아 이동했다. 조식의 기록에 따르면 불일암, 지장암, 쌍계사, 신응사 등 지리산 전역의 사찰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으며 여행하는 식이었다.

또한 조선 중기는 아직 상품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이었기에, 이 거창한 여행 경비는 돈이 아닌 '현물'과 '명성'으로 치러졌다. 조식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전국 곳곳에 관리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유람 과정에서 인적, 물적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행길에 만난 관리들과 주민들은 ‘대나무를 엮어 들것’을 만들어서 조식과 여행객 모두를 어깨에 짊어지고 시내 물을 건너주기도 했다. 시내를 건너 어느 지역에 이르자  안면이 있던 이들이 ‘소반에 생선, 고기, 술’을 챙겨와서 이들을 맞이했다. 물론 모든 사대부의 여행이 이토록 화려했을 리는 없다. 가문의 재력이나 개인의 처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여행단의 규모나 대접의 수준은 제각각 달랐을 것이다.

이처럼 사찰을 거점으로 삼은 조선의 유람 문화는 후기로 갈수록 분업화된 관광 서비스업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행객을 맞이하는 거점 역할을 도맡은 사찰을 중심으로 서비스가 생겨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명산 곳곳에 있던 승려 ‘지로승’과 ‘남로승’이다. 지로승은 산길을 인도하고 명승지를 설명 해주는 전문 가이드 역할을 하는 승려였다. 남로승은 가마에 양반들을 태워 도보로 산을 넘나들던 전문 가마꾼이었다.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장안사〉, 1711 정선의 첫 금강산 여행을 기록한 화첩. 절로 연결되는 다리와 건축물, 주변의 계곡과 산세가 자세히 묘사되어있다. 당시 장안사는 많은 여행객이 머물다 간 거점이었고, 장안사의 승려들은 금강산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5세기까지의 여행자들은 직접 걷거나 말과 나귀를 이용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사찰과 승려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신분제 사회의 한계상 권력층이 과도한 대접을 요구하며 사찰과 승려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적 부작용이 따르기도 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관리가 기생이나 일행을 대거 데리고 와 절에서 연회를 벌이는 바람에 사찰이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당시의 단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현령이 한번 절에서 놀면 중들이 접대하는 비용은 거의 반년 동안의 생활비를 써버리게 된다. 같이 간 사람들이 술, 밥, 담배, 신발을 의례 토색하게 마련이요, 또 만약 기생을 데리고 가서 풍악을 잡히고 광대를 시켜서 잡희를 벌이게 되면 뭇 남녀가 와서 구경하면서 다 중에게 밥을 토색하게 되니 중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 정약용, 《목민심서》 중

다행히 18세기 이후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주요 명소나 교통의 요지마다 대가를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는 ‘주막’이 들어서게 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막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음식은 제공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의 주막은 식사와 숙박을 동시에 제공하는 본격적인 로컬 비즈니스의 형태로 진화해 여행객들을 맞았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현물보다는 ‘상평통보’ 같은 돈을 사용하게 되고 전통적인 과거 시험 뿐 아니라 유람을 떠나는 관광객 그리고 5일장을 다니는 보부상 등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일어난 변화이다. 신분이나 권력으로 서비스를 수탈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합당한 돈을 지불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관광 산업 시장이 비로소 싹을 틔운 것이다.

명산대천을 누비며 삶의 숨통을 틔우고자 했던 선조들의 여가 문화는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역동적이었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조선 후기의 위대한 거장들이 아름다운 진경산수화와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를 수없이 남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즐기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본능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 환경과 조건은 달랐을지언정 오래전 그들이 느꼈던 여행의 설렘과 해방감은 휴가철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dit 이지영 Graphic 조수희

심용환 에디터 이미지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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